지난달 휴가 기간에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다녀왔습니다. 10여 년 전에 취재차 갔던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일반 관객으로 찾아가 다양한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휴가로 갔으면서도 공연을 보다가 자꾸 궁금증이 생겨서 결국은 '취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는 아쉬워서 '내돈내산' 후기를 써볼까 합니다.
축제의 도시 에든버러
에든버러 페스티벌은 8월 한 달간 에든버러 전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축제를 총칭하는 말인데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 그리고 북 페스티벌과 영화제, 밀리터리 타투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펼쳐집니다. 1947년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 열린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시초이고요.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공식초청 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연 축제가 '프린지 페스티벌'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난타'의 성공사례 덕분에 프린지 페스티벌이 먼저 알려졌는데, 프린지는 참가작들의 수가 굉장히 많고 장르도 다양한 데다, 실험적인 시도가 많습니다. 교회, 학교, 공원 등등 시내 전역의 다양한 장소가 공연장이 됩니다. 페스티벌 기간, 시내에서 에든버러 성까지 이어지는 '로열 마일' 거리에선 하루 종일 프린지 공연 홍보와 온갖 거리 퍼포먼스가 펼쳐져 시끌벅적합니다. 그런데 프린지는 참가작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공연을 고르는 데 '모험 정신'이 필요합니다. 수준 이하 졸작도 많지만, 예상치 못한 수작을 만날 수도 있죠.
흙 속의 진주를 찾는 게 프린지의 묘미이긴 합니다만, 이번에 저는 프린지보다는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참가작을 주로 봤습니다. 기존의 주요 공연장에서 진행되는 축제이다 보니 관람료도 일반적으로 더 비싸고 프린지보다는 다양성이 떨어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축제 사무국의 기획 의도에 따라 검증된 예술가들을 초청해 꾸리는 프로그램이라 실패 확률이 낮습니다.
클래식 콘서트인 줄 알았는데?!
제가 본 공연들은 대부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요, 이 중 '브레이킹 바흐'라는 공연을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계몽시대 오케스트라(Orchestra of The Age of Enlightenment) 공연이라 관심을 가졌습니다. 계몽시대 오케스트라는 1986년 런던에서 결성된 유명 연주단체로, 작품이 쓰인 당시의 악기, 조율 방식과 연주법, 연주 관행과 편성 등을 살려서 연주하는 '시대연주(Period performance)'를 합니다. 바로크 시대 음악들을 주로 이렇게 연주하죠.
그런데 '브레이킹 바흐'는 계몽시대 오케스트라가 바흐 음악을 연주하는 일반적인 클래식 콘서트가 아니었습니다. 포스터를 보니 댄서들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알고 보니 오케스트라와 젊고 재능 있는 스트리트 댄서들, 그리고 유명 안무가 킴 브란스트럽(Kim Brandstrup)이 함께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2,200석 규모의 에든버러 어셔 홀 무대는 평소 클래식 콘서트가 열리는 곳인데, 이 날의 무대는 평소와는 달랐습니다. 무대 전면은 반짝이는 거울 바닥과 뒷벽, 그리고 양옆의 벤치 때문에 마치 댄스 스튜디오처럼 보였고, 후면에 단을 쌓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자리 잡게 했습니다. 1층 객석은 평소 객석 의자 대신 푹신해 보이는 갖가지 색깔의 '빈백(Bean Bag)'으로 채워졌습니다.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은 몇몇 공연을 관객 친화적인 '빈백 콘서트'로 운영했는데, '빈백 콘서트'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표를 늦게 사는 바람에 겨우 3층 객석을 잡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알록달록 빈백 객석과 거울 무대 자체가 장관이었습니다.
바흐와 힙합 브레이크 댄스의 만남
첫 곡인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서곡부터 댄서들의 움직임은 생생한 리듬으로 가득했습니다. 18세기 바흐의 음악이 과연 현대 힙합과 스트리트 댄스의 그루브와 어울릴까 했던 의구심은 금세 날아가 버렸고, 저는 어느새 댄서들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같은 느린 곡에서도 힙합의 그루브는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단순히 바흐 음악을 틀고 몸 가는 대로 스트리트 댄스를 춘 게 아니라, 바흐 음악의 복잡한 구조에 힙합과 스트리트 댄스의 리듬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현대무용' 공연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킴 브란스트럽은 이전에도 바흐 음악을 소재로 안무한 경험이 있는 탁월한 안무가인 데다, 댄서들도 자신들에게 낯설었을 바흐의 음악에 유연하게 스며들어 에너지 넘치는 움직임을 보여줬습니다.
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바흐 음악을 더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사실 많은 바흐의 음악은 바로크 무곡 모음곡에서 출발했기에, 춤의 리듬에 뿌리를 두고 있죠. '브레이킹 바흐'는 바로크 음악의 고전적 예술성과 현대 스트리트 댄스의 폭발적인 신체성을 연결하고, 경계를 허무는 무대를 창조했습니다.
솔로에서 2인무, 3인무, 군무까지 다채로운 형태의 춤을 보여준 댄서들은 마지막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피날레에서 고난도 동작들을 펼치며 마음껏 기량을 뽐냈습니다. 전체 댄서들이 다 함께 한 앙코르는 문자 그대로 폭발적이었습니다. 3층까지 꽉 채운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손뼉 치고 환호하고 기립하고 발을 굴렀습니다. 페스티벌 기간 본 공연들 중에서 가장 젊은 관객들이 많은 공연이었고, 객석 분위기도 가장 뜨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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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간 오케스트라의 실험
무대에 오른 댄서들 중에는 킴 브란스트럽과 함께 작업해 온 직업 무용수뿐 아니라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아마추어도 있다고 했습니다. 어려 보이는 무용수가 많았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이들이 북런던 캠든의 애클랜드 벌리(Acland Burghley) 학교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레이킹 바흐' 공연의 씨앗이 이 학교에서 뿌려졌다는 사실도요.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이후 OAE)가 2020년부터 애클랜드 벌리 학교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OAE는 2020년 기존의 사무실 역할을 하던 Kings Place와 계약 만료를 앞두고, 보다 유의미한 공간에서 예산을 활용하기 위해 다른 공간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OAE는 이미 캠던 지역 내 여러 학교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긴말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을 보유한 애클랜드 벌리 학교에 입주를 타진하게 됩니다.
'학교로 간 오케스트라' 유튜브 영상 보기
당시 이 학교 교장은 학교 공간을 외부 단체에 대여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였고, OAE는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의 후원을 받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OAE는 학교 내 어셈블리 홀을 리허설과 공연 장소로 사용하고, 학생들은 연습 현장을 참관하거나 예슬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 "꿈꾸는 젊은 프로듀서 클럽(Dream Chasing Young Producers Club)'을 통해 직접 공연 기획과 제작 경험을 쌓기도 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입주한 학교는 음악이 교실을 넘어 다양한 교과로 확장되는 새로운 교육과 예술 실험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브레이킹 바흐'는 이 학교에서 태어났다
캠든은 펑크와 인디, 힙합 등 대안문화와 라이브 음악 씬이 존재하고,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이민자로 다양한 공동체가 빚어내는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입니다. OAE가 2020년 애클랜드 벌리 학교에 입주했을 때 처음 만난 집단 중 하나가 열정적인 춤 커뮤니티였죠. 곧 OAE와 학생 댄서들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이 학교 10학년 학생들이 OAE가 연주한 장 필립 라모의 오페라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Les Indes Galantes)' 음악에 맞춰 직접 안무하고 춤춘 작품을 볼 수 있는데요, 이 프로젝트는 학생들의 GCSC(영국 중등교육 수료 고사) 시험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해당 프로젝트 영상 보기
그리고 2023년, OAE 대표 크리스핀 우드헤드(Crispin Woodhead)와 킴 브란스트럽의 대화 중 바흐의 리듬과 힙합 그루브를 만나게 해 보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해 여름 킴 브란스트럽과 학생들은 직업 무용수인 토미 프랜즌(Tommy Franzen), 디비언 브라운(Deavion Brown)을 합류시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에 맞춘 18분짜리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스트리트 댄서들의 '리듬 문해력'
2023년 10월, 동료와 가족, 예술계 전문가 앞에서 이뤄진 초연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를 더욱 키웠습니다. 이 '다음 프로젝트'가 바로,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서 전막 프로덕션으로 초연된 '브레이킹 바흐'였습니다.
"스트리트 댄스나 브레이크 댄스 배경을 가진 젊은 무용수들에게서 제가 관찰한 것은, 이전 세대의 무용수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일종의 리듬 문해력(Rhythm Literacy)입니다. 춤의 언어는 리듬이죠. 그것이 바흐이든 재즈이든 어떤 음악이든 상관없어요."
안무가 킴 브란스트럽은 이전에도 바흐 음악에 안무를 많이 했지만, 여러 층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바흐 음악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춤을 만들기는 힘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애클랜드 벌리 학교의 젊은 무용수들을 만나면서, 드디어 바흐 음악의 리듬 코드를 춤으로 제대로 풀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브레이킹 바흐' 작품의 핵심이었다고 하죠.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