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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도둑질…"여기뿐일까?"

유영규 기자

입력 : 2025.07.17 07:16|수정 : 2025.07.17 07:16


▲ 경북 안동 고등학교서 학부모와 전직 기간제 교사가, 몰래 시험지를 빼돌리려다 경찰에 붙잡혀

아들을 교 1등 만들려는 변호사 엄마가 학교 교무부장과 손잡고 시험지를 훔칩니다.

아들은 그 덕에 전교 1등을 하지만 곧 엄마가 시험지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이건 반칙이잖아요"라고 절규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자수하자는 아들의 말에 "엄마 죽는 꼴 보고 싶냐"고 소리칩니다.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

'3대째 의사 가문 만들기'에 올인한 엄마는 모의고사 성적이 하락한 딸 때문에 입시코디를 다시 찾고 학교에서 빼돌린 중간고사 시험지를 보고 또 한번 흔들립니다.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

드라마에나 나오는 내용이 아닙니다.

지난 4일 한밤중 경북 안동시 한 고등학교에서 30대 전직 기간제 교사와 40대 학부모가 함께 시험지를 훔치려다가 사설 경비 시스템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경찰은 이들 사이에 금품이 오간 정황을 확인했으며, 이들이 학교에 침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시설 관리자의 조력이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교사·학교 내부자와 학부모가 공모해 시험지를 유출했다는 범행 구조상 2018년 충격을 안긴 '숙명여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숙명여고 전임 교무부장 A 씨가 같은 학교 재학생인 자신의 쌍둥이 딸들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한 사건으로, 시험지를 빼돌린 학교 내부자가 곧 교사이자 학부모였습니다.

교육열 치열한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시험지 유출이 발생한 점, 중상위권이었던 쌍둥이 자매의 성적이 1년여 만에 급상승해 나란히 문·이과 전교 1등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당시 큰 논란이 됐습니다.

A 씨는 2020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받았습니다.

쌍둥이 딸들에 대해서도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지 도둑질은 그전에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는 전국연합학력평가의 고1 영어영역 문제와 정답이 학원 강사 등 3천200여 명이 모인 오픈채팅방에 유출돼 교육당국이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2022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는 수능 모의평가 당일 문제지 일부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학원 강사에게 유출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광주 대동고에서는 2학년 학생 2명이 교무실에 침입해 교사들의 컴퓨터에 악성프로그램을 설치한 뒤 시험문제와 답안을 빼돌렸습니다.

범행에 가담한 학생 중 한 명이 코딩에 능해 주기적으로 노트북 화면을 캡처해 저장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이를 교사의 노트북에 몰래 심어둔 것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4년 전에도 시험문제 유출이 발생했습니다.

2018년 학교운영위원장을 맡은 학부모가 학교 행정실장을 통해 시험 문제를 빼돌린 바 있습니다.

2017년에는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 교사가 이 학교 출신인 영어학원 원장과 함께 영어시험 문제를 빼돌려 학원 수강생들에게 제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입시 준비에 한창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반복되는 시험지 유출 사건에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부산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1학년 이 모(16) 군은 16일 "공정해야 할 교육이 부정으로 더럽혀진 현실에 참담하다"며 "어른들의 부정이 학생들의 노력을 짓밟았다"고 말했습니다.

중학교 교사이자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인 강 모(53) 씨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기틀을 흔든다는 점에서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조작을 통해 높은 성적을 받은들 장차 아이가 올바르게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한 아이의 학부모로서 너무 화가 난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교권이 하락한 상황에서 이러한 사건이 교육 현장 신뢰도 회복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도 우려했습니다.

강 씨는 "지금도 민원으로 인해 재시험을 치르는 일이 계속 느는데, 이번 안동 사건으로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고 개탄했습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김 모(50) 씨도 "아이들이 학교에 침입해 시험지를 훔친 사건을 보면 안타깝기라도 한데, 다 큰 어른들이 시험지를 빼돌렸다는 것은 그저 화가 난다"며 "성적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아이의 미래보다 중요할까. 부모의 비뚤어진 욕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시험지 유출 사건이 많을 것이라는 의심도 고개를 듭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성적 지상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꼬집었습니다.

홍원표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앞서가야 하는 상대평가 제도와 성적 지상주의가 합쳐져 시험지 유출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며 "높은 성적이 윤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수단으로 학생의 능력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각 방법에 대해 신뢰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어렵겠지만, 지필 평가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날 필요는 있다"고 했습니다.

학생 평가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현장 감독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험지 유출이 반복되는 것은 교육 및 평가 시스템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그에 맞춰서 시스템은 투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시스템이 철저히 정비되고 룰이 투명해져야 한다"며 "교사들에 대한 윤리 교육과 처벌을 강화하고, 이를 감독하는 인력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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