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최고 권위의 연극 뮤지컬상 토니상 6관왕에 올랐다는 소식이 지난주 전해졌습니다. K팝과 영화, 드라마 등 한국 '콘텐츠'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뮤지컬까지 이렇게 두각을 나타낼 줄은, 아마 토니상 수상 소식을 듣고 놀란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대학로에서 초연된 '어쩌면 해피엔딩'사진 : NHN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가 2016년 대학로 300석 규모 극장에서 초연한 소극장 뮤지컬입니다. 박천휴는 한국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작사가로 활동하다가 25살에 뉴욕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고,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뮤지컬 창작을 공부하던 작곡가 윌 애런슨을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윌 애런슨은 2009년 한국의 창작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 음악을 맡으며 한국 뮤지컬 업계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음악을 맡을 때 박천휴를 작사가로 추천해 협업을 시작했습니다. 윌-휴 콤비 협업의 시작이 된 작품입니다.
'번지점프를 하다' 다음 작품이 '어쩌면 해피엔딩'입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5년 우란문화재단에서 리딩(낭독 공연)과 트라이아웃(시범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우란문화재단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모친이며 워커힐 미술관을 설립한 박계희 여사의 호를 따서 설립된 비영리 문화재단으로, 창작진의 작품 개발을 지원합니다. 윌-휴는 이 재단 설립 후 첫 지원 대상자였습니다.
리딩과 트라이아웃을 마친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6년 말 DCF대명문화공장에서 초연된 뒤, 재연도 이어졌습니다. 대명문화공장은 문을 닫았고, 2020년 삼연부터는 CJ ENM이 제작사로 참여해 2021년과 2024년에도 공연했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에서 공연될 때마다 좋은 반응을 얻은 인기작이었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Maybe Happy Ending'으로
'어쩌면 해피엔딩'은 작품 개발 초기부터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영어 버전 공연도 함께 추진했습니다. 한국에서 초연되기 전인 2016년 7월 뉴욕에서 이뤄진 영어 리딩 공연에는 토니상을 8번이나 수상한 베테랑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드가 참석했습니다. 작품을 인상 깊게 본 제프리 리처드는 2017년 윌-휴와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 영어 버전은 2017년 미국 예술문학 아카데미에서 매년 시상하는 리처드 로저스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상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설적인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가 기부해 제정한 상으로, 유망한 뮤지컬 신작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영어 버전 공연은 팬데믹 등 여러 상황이 겹쳐 빠르게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2020년 애틀랜타에서 시범 공연을 시작으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해 마침내 브로드웨이의 벨라스코 극장에서 개막했습니다.
가까운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로봇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SF적 내용을 다룬 '어쩌면 해피엔딩'은 브로드웨이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작품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잘 알려진 소설이나 영화, 혹은 유명 인사의 삶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무명' 창작진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봇이 주인공이라는 점도 그렇고, 등장인물이 4명에 불과하다는 점도, 보통 화려한 군무와 합창이 따르는 브로드웨이 대극장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이었습니다.
보편적 감동 주는 스토리와 음악의 힘사진 : 연합뉴스/NHN링크 제공
실제로 '어쩌면 해피엔딩'은 브로드웨이에서 지난해 개막 초기에는 고전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본 관객들의 입소문이 퍼져나갔고, 반복 관람하는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팬덤'이 형성되었습니다. 작품 중 등장하는 '반딧불이(Fireflies)'가 이 뮤지컬 팬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스토리와 음악의 힘이 그만큼 강했던 것입니다.
박천휴는 토니상 수상 이후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관객의 사연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먼 지역에 사는 한 관객이 뉴욕에 혼자 여행을 와서 열 편의 공연을 예약했는데, 다섯 번째였던 이 공연을 보고 집에 남은 아내가 너무 그리워져 나머지 티켓을 모두 팔고 일정을 변경해 귀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밸런타인 데이에 아내와 함께 뉴욕을 방문해 다시 이 공연을 관람하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언론과 평단의 찬사도 쏟아졌습니다. 평론가 제시 그린은 뉴욕타임스에 "공상과학의 기발함을 겉으로 내세우면서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감동을 슬그머니 숨겨놓았다"며 이 작품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LA타임스는 "실제 사건이나 기존 음악, 자료에 기반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그 무모한 독창성이 가장 큰 장점이 되었다"며 "아파트에 사는 유일한 생명체가 화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독특한 작품"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어워즈 시즌'의 대단원, 토니상까지 휩쓸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토니상 시상식이 열리기 전에도 뉴욕 드라마 비평가 협회, 드라마 리그 어워즈, 외부 비평가 협회상,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 등에서 잇따라 작품상을 비롯한 주요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어워즈 시즌'의 대단원인 토니상에서 작품상, 연출상, 음악상(작사·작곡상), 대본상, 남우주연상, 무대디자인상 등 6관왕에 오르며 올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의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은 사실 같은 공연은 아닙니다. 윌-휴가 공동 창작한 대본과 음악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같지만, 영어 버전은 한국어 버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서울과 제주라는 배경을 유지하고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르되, 문화권이 다른 만큼 영어 버전에서는 달라진 부분이 많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새로 만든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1000석 규모 극장에서 공연되는 만큼 규모 자체가 커졌습니다. 등장인물은 세 명에서 네 명으로 늘었고, 무대도 더 화려해졌습니다. 대사와 뮤지컬 넘버도 문화권 차이를 고려해 수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슬픈 발라드 감성으로 부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넘버는 한국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영어 버전에서는 좀 더 밝은 분위기의 새로운 곡으로 교체됐습니다. 미국 관객들은 이런 발라드 넘버를 과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반영된 것입니다. 당연히 연출과 무대, 의상 등 공연 전반이 달라졌습니다.
영어 버전 '어쩌면 해피엔딩'은 현지에서는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 미국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입니다. 한국인이 썼고 한국이 배경인 작품을 브로드웨이 프로듀서가 브로드웨이 스태프를 고용해 제작한 뮤지컬입니다. 프로덕션 크레딧을 보면 리드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드와 헌터 아놀드 아래 수많은 공동 프로듀서, 투자자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국내 공연 제작사였던 CJ ENM의 이름은 없습니다.
한국 공연 제작사였던 CJ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 소식에 많은 이들이 '뮤지컬의 기생충'이라고 했지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 대표 프로듀서로 CJ 이미경 부회장이 소감을 발표했던 것과는 달리, 토니상에서는 한국 공연 제작사였던 CJ의 존재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CJ ENM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킹키부츠'나 '물랑루즈'에 투자했던 경험도 있기 때문에, 국내 공연 제작을 맡았던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공연에도 참여했을 법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확인해보니 CJ ENM은 브로드웨이 공연에 투자 제안을 받았지만, 팬데믹을 겪으며 타격이 컸고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해 보수적으로 운영하던 중이라 새로운 투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CJ는 이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직접 투자하지 않은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존재가 지워져 버렸습니다. CJ로서는 굉장히 아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티켓 예매사이트인 티켓링크를 인수하고 문화산업 투자를 늘려오던 NHN그룹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룹 내 문화콘텐츠 산업을 담당하는 NHN링크를 통해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공연 제작에 투자했습니다. 크레딧에 표시되는 순서가 기여도(즉 투자 금액) 순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NHN링크는 영어 버전 '어쩌면 해피엔딩'에 총괄 제작자를 제외하고 세 번째로 큰 지분을 보유한 셈입니다. 영어 버전의 뉴욕 리딩 공연을 지원했던 우란문화재단의 이름도 뒤쪽이긴 하지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어햅'과 '메햅'은 같지 않다사진 : 연합뉴스/NHN링크 제공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어햅'이라는 약칭으로 통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 버전은 '메이비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을 줄여 '메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어햅'은 올가을 한국에서 공연됩니다. 이번에는 전보다 큰 극장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만큼 좀 더 규모가 커질 예정입니다. 이 공연은 토니상 수상 이전부터 계획된 공연이며, 제작사는 NHN링크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토니상을 받은 건 '어햅'이 아니라 '메햅'입니다. '메햅' 역시 한국에 들어올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 혹은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 내한 공연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창작 뮤지컬이 토니상 6관왕에 올랐다'는 표현이 과연 정확한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물론 박천휴가 한국인 최초로 토니상 대본상과 음악상(작곡·작사상)을 수상했다는 점,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이 한국 창작 뮤지컬로 처음 출발했고 한국 관객과 호흡하며 성장한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비적인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한때 한국 제작사가 해외 창작진을 기용해 외국 이야기를 갖고 만든 뮤지컬을 '한국 창작 뮤지컬'로 부를 수 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웃는 남자' 같은 작품들이 그 사례인데, 관객 입장에서는 해외 라이선스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작품들도 한국 창작 뮤지컬로 분류하는 추세입니다. 그렇다면 신춘수 대표가 리드 프로듀서로 제작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 창작 뮤지컬일까요? 해외 창작진이 쓰고 연출해, 처음부터 영어로 해외에서 공연되는 작품임에도 말입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사실 K팝의 '기준'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예전엔 한국인이 한국어로 해야 K팝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한국서 활동하는 K팝 그룹에 외국인 멤버는 다반사고, 한국 아이돌이 외국어로 부르는 K팝, 외국에서 외국인 멤버로만 구성된 K팝 그룹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획사가 만들면 K팝이라는 공감대가 생긴 듯했지만, 외국 기획사가 K팝 스타일로 제작한 그룹들도 나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한국인 K팝 기획자가 외국 기획사와 함께 만든 그룹은 K팝 그룹일까요? 무 자르듯 단순한 기준으로 이건 K팝이다, 아니다,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K팝이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일입니다.
뮤지컬 분야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K팝에 비하면 글로벌 영향력은 아직 제한적이고 공연 산업은 음악보다 훨씬 이동이 어려운 분야이지만, 요즘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창작 뮤지컬의 라이선스 수출이 한 해 수십 건에 이르고, 일본에서는 한국 IP인 '미생'이 뮤지컬로 제작되었으며, 아시아 각국의 프로듀서들이 한국 창작 IP를 공동 제작해 자국어로 공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번 토니상 수상은 이런 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는 작가뿐 아니라 배우, 제작자, 연출가, 무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뮤지컬 인력들의 활약이 전 세계에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토니상을 받은 '어쩌면 해피엔딩' 영어 버전, 곧 '메햅' 역시 한국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이든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의 내한 공연이든, 한국에서 시작해 해외에서 새로 쓰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여정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K팝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처럼, 단일한 답을 내놓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당장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만,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뤄지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윤곽이 드러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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