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찮은데 '갑질'까지 당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함께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립니다.
"아니, 기본적으로 직장생활에서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조사를 하는 자리에서 괴롭힘 행위자로 지목된 상사 A가 한 말이었다. 신고인 B는 조직생활이 얼마 안 된 신입 직원이었다. 팀장이 B에게 "오전까지 그 서류 좀 마무리해서 가져다줄 수 있을까?"라고 물었더니, B는 "지금 밀린 일이 많아 오전까지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팀장은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분위기는 싸해졌다고 했다. 또 한 번은 B가 제출한 결과물을 팀장이 보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하자, B는 "뭐가 아닌 것 같으신데요?"라고 되물었다고 했다. 한 번쯤은 자기가 뭘 잘못한 건지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런 자세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A는 이러한 일화들을 들어 "B는 눈치가 너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몇 번 B를 따로 불러 "회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며 "분위기나 상황, 상대방이 누군지를 좀 보고 그에 맞게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다"고 에둘러 설명하고 가르치려 했는데, 그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되었다며 억울해했다.
A는 스스로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마음이 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다만 A의 말들 속에서 안타까웠던 건, 본인의 언행을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눈치를 '직장인의 기본기'처럼 여겼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말을 아끼고, 감정을 숨기고, 직접 말하지 않고도 상대방이 '알아채야' 하는 문화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치가 없는' 직원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규정되어있지 않지만 지켜야 할 규칙'을 강요하는 문화가 문제일 수 있다는 관점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문화심리학자인 미셸 겔팬드의 연구에 따르면 65개국 대상으로 사회적 규범 준수 강도를 비교해 본 결과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9위를 기록했다. 사회적 규범, 즉 눈치를 보는 문화가 강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규범'에 엄격한 문화라는 것이 오늘날 조직에 그리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장 내 눈치 문화는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위계적인 조직 속에서 피어난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이는 조직 내 권위 있는 사람과 집단의 기분과 결정을 먼저 살피고, 분위기를 흐리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고, 가장 빠르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공유하게 한다. 실력이 아니라, 눈치껏 하는 행동이 더 중요해지는 환경에서는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문제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묻는 것조차도.
B는 잘못된 지시를 거부한 것도, 공격적인 언행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팀장의 말에 명확히 자신의 상황을 말했고, 모호한 평가에 이유를 물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직은 그런 사람을 '눈치 없는 사람'으로 분류하고, 교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결국 침묵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모르는 척 넘어가야만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강요하는 조직문화인 셈이다. 그러한 문화가 유지되는 한, 직장 내 괴롭힘은 단지 물리적 언어나 폭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강압적인 지배와 통제가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인된다.
눈치가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비공식적인 규칙을 강화한다는 데 있다. 누구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하는 규범. 이를테면 회식은 '자율'이지만 빠지면 이상하게 되는 것, 보고는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제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눈밖에 나는 것, '가능하냐'는 질문은 실상 '무조건 하라'는 명령이 되는 것. 이 모호한 압력 속에서 사람들은 '기분'을 더 많이 관찰하고, '논리'보다는 '공기'를 먼저 고려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직장 문화를 비민주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눈치가 아닌 배려가 장착된 조직을 상상해 보자. 눈치는 윗사람의 감정을 짐작하고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따지는 것이라면, 배려는 상하를 막론하고 상대의 입장을 직접 헤아리고 묻고 듣는 태도다. 그래서 눈치가 위계적인 조직의 생존전략이라면, 배려는 수평적 관계에서 동료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이다. B의 눈치 없다 지적된 사례는 정말 눈치 없는 행동인가? 무례하거나 직장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행동인가? 오히려 애매한 공기에 의존하지 않고 명확하게 본인의 상황을 설명하고, 상대에게 확실한 피드백을 요구하는 언행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일하는 사람은 추측이 아니라 설명을, 감정이 아니라 원칙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조직이 그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했을 때 조직에 다양한 의견들이 환류될 수 있게 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