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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했다. 미국 주식시장과 채권·외환시장은 상반된 움직임을 보였다. 주식시장은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뉴스가 전해진 직후에는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들 중 S&P는 오바마 정권이었던 2011년에 이미 신용등급을 강등했고, 피치 역시 2023년에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췄기 때문에 주식시장은 새로운 악재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반면 채권시장은 발작적인 동요를 보였다. 미국 국채 10년물은 4.5%까지 급등하면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고, 30년물은 최근 5년래 최고 수준까지 치솟으면서 5%대 위로 올라섰다. 외환시장에서도 달러가치는 가파른 약세를 나타내면서 선진국 주요 통화에 대한 미국 달러 가치 변동을 나타내는 달러인덱스가 100p 밑으로 떨어졌다. 4월 중 1480원대까지 상승했던 원/달러 환율도 하락세를 지속하면서 5월 27일 현재 1370원대로 내려앉았다. 금리가 오르고, 달러가 약해지자 미국 주식시장도 약세를 나타내면서 뒤늦게 반응했다.
국채금리는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들이 요구하는 수익률의 개념이다. 미국 정부의 재정 건전성이 악화된 결과 신용등급이 강등됐으니,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 입장에서는 더 높은 리스크 프리미엄을 반영해 금리를 높게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미국 국채 금리가 상승한 이유이다. 통상 금리가 상승하게 될 경우 해당 국가의 통화가치는 강해지지만, 최근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국채금리가 빠르게 상승하는 흐름 속에서도 달러는 약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미국 금리 상승이 경기 호조의 산물이 아닌 미국 정부의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됐다면 달러가치의 하락은 불가피하다.
향후에도 달러 약세 흐름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수개월의 짧은 흐름이 아닌 2~3년 이상 달러가 약했던 사례는 역사적으로 세 차례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2000년대 초반이 그 시기들이다. 세 시기는 뚜렷한 공통점들이 있었는데, '재정수지 악화', '공화당 집권기', '감세'가 그것들이다.
재정수지의 악화가 늘 달러 약세를 불러왔던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미국의 직전 정권인 바이든 행정부 때가 그랬다. 미국 재정수지 적자는 GDP의 7%에 달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바이든 집권기 전반적으로 달러는 강했다. 재정수지 적자에 감세와 공화당 집권이라는 요인들이 더해질 때 달러는 추세적으로 약했는데, 이 세 요인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미국의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 정당들은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정부의 개입보다는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조세 정책은 당연히 감세이다. 정부가 세금을 더 걷어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것보다, 세금을 깎아줘 민간이 경제적 자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 정당들이 집권할 때 늘 스트레오타입처럼 주장하는 정책들이 감세와 규제완화이다. 반면 경제적 진보주의자들은 시장의 전능함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정부의 개입으로 시장의 불완전함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세와 재정지출 확대가 이들의 정책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때로는 경제적 보수주의자들이, 때로는 경제적 진보주의자들이 헤게모니를 가지고 경제를 운용해 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제적 보수주의자, 즉 공화당 집권기에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고, 달러가 약세를 나타냈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달러 약세는 공화당의 닉슨·포드 대통령 집권기에,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달러 약세는 공화당 레이건, 조지 H.W부시 대통령 재임기에 나타났다. 2000년대 초의 달러 약세 역시 공화당 조지 W.부시 대통령 집권 국면에서 가시화됐다.
공화당 집권기에 재정적자-달러약세 조합이 나타났던 이유는 이들이 경제적 보수주의자로서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세는 이들의 철학에 맞는 정책이고, 이에 조응하는 재정정책은 정부지출을 줄이면서 '작은 정부'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화당 집권기라고 해서 재정지출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정부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발언하면서 집권했던 레이건 행정부의 재정지출은 전임 민주당 카터 행정부에 비해 56%나 급증했다. 조지 W.부시 대통령 집권기의 재정지출은 전임 민주당 클린턴 정부에 비해 22%나 늘어났다. 정부 지출을 줄이지 못하는 가운데, 감세까지 더해지니 미국 정부의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던 것이다.
요즘 상황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감세를 추진하면서도, 정부지출 축소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야심차게 출발했던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었던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 복귀를 밝힌 가운데, 연방정부 지출 축소 규모는 당초 공언했던 2억 달러에 턱 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의 극단적 보수파인 프리덤 코커스가 요구하고 있는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험) 지출 축소 요구와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주장하고 있는 정부부채 한도 확대 반대 의견에 대해 완강한 거부의사를 밝히고 있다. 메디케이드 축소와 국가부채 한도 확대 반대는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는 주장은 아니지만, 아무튼 감세와 함께 정부지출 축소 계획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미국은 정책적으로도 달러 약세를 용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대만 등과의 무역협상에서 미국이 환율을 의제로 들고 왔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달러 약세 유도를 통해 무역수지 적자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의도이다. 가깝게는 트럼프 정권의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인 스티브 미란이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대외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달러 약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 바 있고, 멀리는 미국에서 무역수지 흑자를 많이 내는 일본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의 인위적인 절상을 유도하면서 미국 무역수지 적자 축소를 도모했던 1985년의 플라자합의가 있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