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 발레단인 잉글리시내셔널 발레단에는 한국인 수석 무용수가 있습니다. 바로 발레리나 이상은 씨입니다. 이상은 씨는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 독일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거쳐, 2023년부터 잉글리시내셔널 발레단의 리드 수석 무용수(Lead Principal)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symphony in C-G.balanchine / photo by Ian Whalen
이상은 씨는 한국에서 '최장신 발레리나'로 불렸습니다. 과거 기사들을 보면 키가 181cm, 182cm로 표기돼 있는데, 본인에게 직접 물어봤더니 "183cm"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기사나 오디션 나갈 때는 좀 줄여서 냈죠. 178cm라고 보낸 적도 있어요. 커트라인이 있으니까... 너무 커도 안 되잖아요. 실제로 보면 더 커 보여요. 사실 발레하기에는 많이 큰 편이죠."
보통 발레단에서 선호하는 발레리나의 키는 165~173cm 사이입니다. 군무에서 튀지 않고 적당한 키이고, 남자 무용수와 파트너링하기에도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키가 크면 함께 춤출 남자 무용수를 찾기 어려워집니다.
이상은 씨에게 '큰 키'는 오랫동안 고민거리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이미 170cm가 넘었다고 합니다.
"중3, 고1 때는 180cm가 넘었어요. 아, 이제 발레 못하는구나. 좌절감을 많이 느꼈죠."
그래도 발레가 너무 좋았던 이상은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005년 바로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습니다. 발레리나의 수명이 짧은 만큼 최대한 젊을 때 좋아하는 발레를 하다가, 대학은 나중에 가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해외 발레 학교를 졸업하고 10대 후반에 발레단원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대학을 먼저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렸지만, 이상은 씨는 용감하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습니다.
"공부가 싫었다기보다는, 발레가 너무 좋았어요. 너무 하고 싶었고."Bach deut by william forsythe / photo by Baki
유니버설발레단에 들어간 이상은 씨는 곧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컨템퍼러리 발레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솔리스트로 승급도 했습니다. 해외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그는 2008년 여러 해외 발레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연거푸 낙방했습니다. 키가 너무 커서 안 된다는 발레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그는 '마지막 오디션'을 보게 됩니다.
이상은 씨가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독일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발레단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안 되면 발레를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이 발레단은 클래식에서 컨템퍼러리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고, 키 큰 무용수도 많아 이상은 씨가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상은 씨는 2008년 유니버설발레단의 컨템퍼러리 발레 공연에서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발레단의 발레 마스터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의 기념비적인 작품 '인 더 미들(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당시 안무 지도를 위해 왔던 발레 마스터가 그를 눈여겨봤던 겁니다. 발레 마스터의 도움으로 2010년 입단 오디션을 볼 수 있었습니다.
Metamorphosis by David Dawson
그런데 오디션을 보고 나서 젬퍼 오페라발레단 단장은 "네가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라는 건 알고 있지만, 우리는 솔리스트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상은 씨는 "군무라도 상관없다. 제발 나를 뽑아달라"고 사정해 군무 단원으로 계약하게 됩니다. 솔리스트에서 군무로 '강등'을 감수하고 해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상은 씨는 처음엔 군무를 주로 맡았지만, 점차 주역도 맡게 되면서 솔리스트를 거쳐 2016년 수석 무용수로 승급합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큰 키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치기 어려웠는데, 드레스덴에서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게 쉽게 안 바뀌더라고요. 항상 조금 수그리고 다니거나 남들에게 맞추려고 하고, 저도 모르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한국)에서는 위축까지는 아니더라도 '아, 내가 발레하기엔 너무 큰 키구나' 하면서 스스로 좀 닫혀 있었는데, 외국 나가니까 '키가 크네, 너무 좋네. 좋은데 왜 이렇게 크게 안 써? 왜 이렇게 작게 써?'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고가 전환되는 시기가 있었어요."
이상은 씨는 큰 키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발레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온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면서, 전보다 더 자신 있게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대학에 진학하면서 미뤄뒀던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됩니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것입니다.
"단장님이 잉글리시내셔널 발레단으로 옮기게 됐는데, 저한테 같이 하자고 해주셔서 고민이 많이 되긴 했어요. 제가 사실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고, 옮기기에는 좀 늦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워낙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상은 씨는 잉글리시내셔널 발레단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해, 영국 발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출연한 로열 앨버트 홀 '백조의 호수' 실황 영상을 보면, 이상은 씨가 컨템퍼러리뿐 아니라 클래식 작품에서도 빼어난 무용수라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아하고 유연하며 날렵한 백조 연기로 관객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고, 이 영상은 영화관에서도 개봉되었습니다.
이상은 씨 얘기를 들으면서 지난 2월 로잔 콩쿠르에서 한국인 발레리노 최초로 우승한 박윤재 군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그는 평소 굵은 다리가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로잔 콩쿠르에서 그는 "네 다리는 힘이 있고 에너지가 넘쳐서 멋지다"는 칭찬을 받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계속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그냥 좋아하기로 했어요." 그는 그동안 콤플렉스로 여겼던 굵은 다리를 오히려 자신의 강점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박윤재 발레리노 / AP 연합
전설적인 발레 스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키 168cm로 다른 남자 무용수들에 비해 작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날렵하게, 높이 뛰며 무대를 장악했습니다. 발레를 하기에 적합한 키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최고의 발레리노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발레는 타고난 '신체 조건'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이들은 흔히 단점으로 여겨지는 조건 때문에 위축되기보다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장점으로 드러냈습니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 영화 '백야(1985)'의 한 장면
이상은 씨는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며 여러 번 슬럼프를 겪었다고 말하지만, 결국 모두 겪어야 할 과정이었고 특별한 성공의 비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럼프가) 여러 번 있었죠. 처음에는 외국에 나가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2008년 처음 나가서 오디션 봤는데 하나도 안 됐어요. 오디션 초대받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우리 발레단이랑 맞지 않는다', '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경우가 많았고. 로잔 콩쿠르는 처음 나간 국제 콩쿠르였는데 파이널에서 넘어지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지금 잘 된 거죠. 사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좋은 경험 하고 드레스덴으로 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도 있고요.
당시에는 '나는 왜 이럴까?' 싶었고, 슬럼프였던 것 같았는데, 좀 지나고 보니 '이렇게 되려고 했나?' 싶더라고요.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냥 열심히, 꾸준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잘 풀린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제가 잘해서 잘 됐다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dying swan, semperoper / Ian Whalen photography
"발레가 뭐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발레는 정말 어려운데, 딱 시작하면 다른 잡생각이 아무것도 안 들더라고요. 걱정 같은 것도 잊고, 그냥 발레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정말 좋았어요. 약간 명상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어렸을 때도 그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나중에 공부하면서 알았는데, 그걸 '몰입'이라고 하더라고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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