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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산불 한 달, 집 잃은 한인 "맨발로 뛰어나왔는데…다 타버려 막막"

유영규 기자

입력 : 2025.02.07 06:46|수정 : 2025.02.07 06:46


▲ 지난달 8일 LA 알타데나에서 한인 이모(64) 씨가 주택이 불에 타는 모습을 찍은 사진

"새벽에 잠깐 눈을 붙였다 깼는데, 우리 집 창문에 불이 확 붙은 거예요. 입었던 옷 그대로,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정신없이 뛰어나왔습니다. 몸은 겨우 피했지만, 집이 완전히 타버렸어요. 23년간 살아온 집인데…."

지난달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집을 잃은 한인 이 모(64·여)씨는 6일(현지시간) 인터뷰에서 한 달 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씨는 '이튼 산불'이 발생한 LA 카운티의 동부 내륙 알타데나에서 거주하다가 화마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알타데나는 한인들이 많이 살지 않는 지역이어서 산불 발생 초기에는 한인 피해 사례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 씨 본인이 LA 한인회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심각한 피해를 본 사실이 알려지게 됐습니다.
불타버린 집에서 남아있는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는 한인 이 모 씨
이 씨는 한 달 전 집 근처에서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이런 사태까지 맞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전에도 근처 산지에서 몇 차례 대형 산불이 난 적이 있었지만, 산지가 워낙 넓고 주택가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사람이 사는 동네까지 불길이 내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산불 발생 전날부터 미친 듯한 돌풍이 불어닥친 탓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 씨의 집을 포함한 알타데나 주택가에는 산불 발생 당일 이른 아침부터 강풍 탓에 전신주 등이 쓰러지면서 전기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었던지 이 씨의 이웃집에 주차돼 있던 픽업트럭이 전복될 정도였다고 이 씨는 전했습니다.

당일 이 씨의 남편은 잠시 한국에 가 있었고, 이 씨는 같이 사는 딸에게 강풍과 정전 때문에 힘든 상황이니 다른 곳에서 하루 묵고 오라고 얘기해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그는 당일 직장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집에 왔을 때 직장 동료로부터 집 근처에 산불이 났다는 뉴스를 전해 들었고, 저녁 6시 15분 집 밖으로 상황을 살피러 나갔을 때 저멀리 떨어진 '이튼 캐니언' 산지에서 오렌지색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20분가량 지났을 때는 불길이 금세 산으로 크게 번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씨는 옆집 할머니가 차에 짐을 싸서 대피를 떠나는 것을 보고 본인도 옷가지 몇 개랑 중요한 서류 같은 것들을 챙겨 일단 차에 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산불 연기를 피해 하루 정도 떠났다가 돌아올 생각으로 최소한의 짐만 챙겼다고 합니다.
LA 알타데나에서 산불에 전소된 한인 이 모 씨의 주택과 자동차
그러고서 불안한 마음에 8일 자정을 넘길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고, 오전 5시 20분쯤 잠에서 깼을 때는 불길이 이미 이 씨의 집 앞까지 들이닥쳐 있었습니다.

이 씨는 "우리 집 양쪽 옆에 큰 나무들이 있는데, 그 나무들에 불이 붙어 타올랐고, 옆집에서는 창문이 훨훨 타고 지붕에도 불이 덮친 상태였다"며 "너무 놀라서 곧바로 뛰어나와 차를 몰고 대피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호텔과 에어비앤비 숙소 등을 전전했고, 불길이 잡혀 약 9일 만에 돌아와 집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는 집터에 잿더미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씨는 "그야말로 쇠붙이만 남고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며 말을 잇기 어려워했습니다.

이 집은 이 씨의 가족이 지인에게서 좋은 집을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임차해 23년간 계속 살아온 보금자리였습니다.

이 씨 부부는 한국에서 유학을 온 뒤 정착해 34년간 미국에서 살았는데, 그 세월의 대부분을 이 집에서 보냈습니다.

수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인 만큼, 상실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운 듯했습니다.

게다가 이 씨 가족은 주택 임차인 보험을 따로 들어놓지 않아 손실된 가구, 물품들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이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이 씨는 "새집을 구하려고 알아보는 중인데, 우리 집 크기의 절반도 안 되는 집이 (임대료가) 훨씬 더 비싸더라"며 "더구나 남편이 작년에 퇴직해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이어 "FEMA(미 연방재난관리청)에서 기본적인 가전제품 구입비 등으로 지원해 주는 게 1만 3천 달러(약 1천880만 원) 정도인데, 그거 갖곤 뭘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여러 모로 막막하다"며 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재난에서 생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정신적으로도 아직 힘든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면서 악몽도 많이 꾸고, 밖에서 경찰차나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날 때마다 진땀이 나곤 한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에서는 그래도 다치지 않고 몸이 괜찮으니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위로하는데, 사실 지금은 그런 말도 위로가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또 이번 재난 대응에 한 박자 늦었던 LA 행정 당국에도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그날 대피하라는 문자를 못 받았어요. 나만 못 받았나 싶어서 쉘터(피해자 대피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무도 못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일부는 경찰이 문을 두드려서 알려줬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동네 뒤쪽에 있어서 그런 소리도 못 들었고요. 재난 문자를 보냈으면 짐을 좀 더 많이 챙겼을 텐데…우리 딸 어린 시절 사진 앨범도 못 챙겼네요."

(사진=본인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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