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의 확률 게임을 통과합니다. 어떤 얼굴, 어떤 키, 어떤 지능과 재능을 지니고 태어날지의 상당 부분은 '무지의 베일' 뒤편, '운'에 따라 진행되는 유전적 조합 과정을 통해 결정됩니다.
이렇게 '운'의 무작위 조합을 거쳐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자비하게 작동하는 '운'의 소용돌이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운 좋게 잘나게 태어난 소수의 이들만 이익을 누리고, 운이 나빠 크고 작은 결점을 안고 태어난 많은 이들은 계속 소외돼야만 하는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은 이런 사회를 '정의롭다'고 여기기 어렵고,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 또한 높을 수 없을 겁니다.
평생 '정의'라는 주제만을 연구해 온 롤즈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운'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의 설계도를 연구해 왔습니다. 타고난 약자에게는 보호와 조력을 해주고, 그들의 결점으로 비롯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정 부분 사회가 함께 나누어지는 것. 부침을 겪어오긴 했지만, 함께 사는 사회가 유지되려면 이런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근대 이후 점점 넓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더 스피커>에서는 이 주제와 관련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원치 않았지만 '운'의 영향으로 발달장애인으로 태어난 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그가 소속된 사회는 누구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복지관 가지 못한 발달장애인의 방화
지난 2023년 10월 21일 새벽 1시 반. 당시 25살이던 자폐성 발달장애인 김 모 씨는 부모가 자고 있는 사이 집을 빠져나와 살고 있던 아파트 지하 분리수거장 쓰레기 더미에 불을 붙였습니다. 김 씨는 수사기관에서 '불이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가 지른 불로 아파트 지하 시설들이 피해를 입었고, 대피하던 주민 8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한 달여 뒤 새벽, 김 씨는 또다시 부모가 잠든 사이 집을 빠져나와 빌라 분리수거장 쓰레기 더미에 불을 붙였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불은 빌라 벽면과 주차장에 있던 승용차 1대를 태웠습니다. 김 씨는 현주건조물방화, 일반자동차방화, 재물손괴, 현주건조물방화치상 등 4가지 죄명으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일반 다중에게 피해를 유발했고, 범행을 반복했다는 점에서 검찰은 김 씨의 죄가 매우 중하다고 보고 징역 7년을 구형했습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 씨의 부모는 "죄에 따르는 책임은 져야겠지만, 징역 7년은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전까지는 큰 사고를 친 적이 없던 김 씨가 이런 일들을 벌인 데엔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달장애인 김 모 씨 아버지
○○이가 성인이 된 뒤에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복지관에 다녔어요. 그런데 저희가 일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난 뒤에는 복지관에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중구도 있고 종로구도 있고 동대문구도 있고 여러 군데 해놨는데. 복지관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지내고 할 때는 아이가 이상한 생각을 하거나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상 행동이 심해진 것 같아요.
법원 "국가와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댈 과제"
여러 차례의 공판 끝, 재판부는 김 씨에게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최경서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저지른 범죄 행위만을 보았을 때는 피고인을 엄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피고인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면 과연 피고인을 엄벌에 처하는 것만이 국가 형벌권의 적정한 행사인지는 다소 의문"이라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고인과 같은 지적장애인이 미성년자일 때에는 초중고교의 특수반 또는 특수학교의 교육을 통해 여러 관리를 받을 수 있지만, 성년이 된 이후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는 복지제도 내지 혜택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고, 성인 지적장애인의 보호·관리를 위한 책임은 대부분 가족(부모)에 귀속되어 지적장애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둔 가족 전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판시했습니다. 발달장애인 김 씨가 복지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었을 때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가족의 생업을 이유로 이사를 한 뒤 복지관 이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증세가 악화돼 일탈 행동에 이른 것이 재판 과정에서 확인됐다고도 판단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 판결문 中
피고인과 같은 성년 지적장애인이 한 명의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비단 피고인의 부모에게만 주어지는 개인적 책임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해야 할 공통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피고인의 특수한 사정은 이 사건에서 피고인에 대한 형을 정함에 있어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검찰이 판결에 항소하면서 법정 공방은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진행되고 있는 법정 다툼은 또 있습니다. 김 씨의 범죄로 발생한 재산상 피해를 부모가 대신 물어내라는 민사 소송이 제기된 겁니다. 보험사는 김 씨의 방화로 20억 원 가까운 피해가 발생했다며, 민사상 손해배상을 김 씨 부모에게 청구한 상태입니다. 김 씨 부모가 적절한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으니, 발생한 피해액 대부분을 대신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김 씨의 부모는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이 저지른 잘못을 모조리 부모에게 떠안도록 하는 건 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발달장애인 김 모 씨 아버지
○○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져야 되겠죠. 책임을 아예 지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장애인인 ○○이로부터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화재 발생으로 인한 피해 수십억 원을 모두 발달장애인의 부모에게 다 지라고 하는 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이제 성인이기도 한데, 새벽에 아이를 묶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요. 정말 너무도 막막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어떨 땐 같이 죽어버려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