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기원전(B.C.) 141년 한무제(漢武帝) 유철이 16살로 즉위했다. 당시 한나라는 대외적으로 편치 못했다. 북방의 유목국가가 번영을 구가하며 핍박해 왔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B.C. 209년 묵돌 선우가 제위에 오르면서, 영토를 동으로는 만주에서 서로는 서역까지 확장했다. B.C. 200년 한고조 유방이 이끌고 온 32만 명의 대군도 물리쳤다. B.C. 3세기부터 600여 년 동안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초원의 제국 흉노(匈奴)다.
유방은 흉노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었고 숨을 거둘 때는 "절대 흉노와 싸우질 말라"고 유언했다.
![란저우의 간쑤성박물관에 흉노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미니어처](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04_700.jpg)
당시 흉노는 묵돌·노상·군신 선우로 이어지는 3대 81년 동안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에 따라 한무제는 즉위 초기에 화친 정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B.C. 135년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두태후가 죽자, 거침없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먼저 국정을 농간하던 두태후 일족과 추종 대신을 숙청했다.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했다. 효렴제를 실시해 효행이 뛰어나거나 청렴한 인재를 등용했다.
내정을 다진 한무제는 B.C. 133년에 직접 흉노와의 전쟁에 나섰다.
![란저우시 곽거병테마공원. 란저우는 한대에 서역으로 가는 최전선이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13_700.jpg)
그러나 군신 선우는 기병 10만을 이끌고 맞섰지만, 마읍에서 한군 30만 명이 매복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 따라서 선우는 철군을 단행해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한군은 기병이 취약해 추격전을 감행할 처지가 못 됐다. 결국 한무제는 대군을 동원한 데 따른 인적, 물적 손해만 감수했다.
4년 뒤 한무제는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 장군에게 각각 1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본래 화친맹약에 따라 한과 흉노는 진대에 쌓은 만리장성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이때 한군은 처음 장성을 넘어 북진했다.
![흉노 정벌을 위해서 출진하는 한나라 장군과 병사 부조물](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05_700.jpg)
흉노 땅에 진입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공손오와 이광은 대패했고, 공손하는 길을 헤매다 돌아왔다. 위청만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흉노 땅을 탐색한 성과는 있었다. 따라서 이듬해 위청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가서 수천 명의 흉노군을 참수했다.
B.C. 126년 흉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군신 선우가 죽자, 동생인 이치사가 어린 태자를 쫓아내고 즉위했다.
흉노가 번성한 배경은 선우의 뛰어난 용인술이 한몫했다. 한나라는 패전한 장수를 사형에 처했지만, 흉노는 적장을 포로로 잡아 장군으로 중용했다.
![우웨이시에서 출토된 청동기마병용은 한나라 군진 형태를 보여준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06_700.jpg)
그런데 이치사 선우는 한 황제와 같은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B.C. 123년 위청은 전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내몽골 전역을 휩쓸며 적군 1만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치사 선우의 주력 부대와 조우하면서 대패했다. 우장군 소건은 휘하 병사를 모두 잃고 혼자 도망쳤다. 전장군 조신은 전투에서 져서 기병 800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단지 한 장수가 치고 빠지는 기습 공격을 능란하게 펼치면서 흉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위청의 생질이자, 18살이던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한나라는 흉노에게 대항하기 위해 기마병을 양성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07_700.jpg)
곽거병은 공주의 시녀였던 위소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모가 황후에 오르면서 2살 때 일가족이 모두 귀족이 됐다. 어릴 적 집안이 풍족하진 못했으나, 궁을 자주 드나들며 한무제의 눈에 들었다.
학문에 정진하고 무예를 익혀 16살부터 군대에 몸을 담았다. 18살에는 표요교위로 참전해 위기에 빠졌던 한군을 구출했고, 수하 800명을 이끌고 진격해 흉노군 2천8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무제는 공로를 인정해 곽거병에게 작위를 내렸다. B.C. 121년에는 표기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최정예 기병 1만을 주었다.
![한대에 왕실과 귀족 사이 기마청동용을 무덤에 부장하는 것이 유행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08_700.jpg)
그에 부응하듯 곽거병은 지금의 간쑤(甘肅)성에 3차례 출격해서 큰 전공을 세웠다. 흉노의 번왕 절란왕과 노호왕을 죽였고, 혼야왕을 항복시켜 기롄산까지 평정했다. 사서는 "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잘랐다"고 적었다.
B.C. 119년 한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을 쌍익으로 삼아 각각 5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 토벌전에 벌였다. 곽거병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서 출병해 1천 리까지 북진하며 흉노의 왼쪽 어깨를 잘랐다. 번왕 3명을 주살했고 장군과 신하 83명을 붙잡았다. 병사는 7만 443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대에 만든 나는 제비의 등을 밟고 뛰는 말 청동상 마답비연(馬踏飛燕)](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09_700.jpg)
곽거병 군대의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적의 것을 빼앗아 군량미와 말 먹이로 충당했다. 이렇듯 곽거병은 한무제의 날카로운 비수로 흉노를 난도질했다.
흉노는 제국의 좌우 어깨가 잘려 나갔기에 간쑤성과 내몽골 남부를 완전히 포기했다. 한군의 예봉을 피해 수도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옮겼고, 한동안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곽거병은 불과 23살에 요절했다. 사막과 초원을 전전하면서 풍토병에 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에 따르면, 곽거병은 생전에 6차례를 출정했다.
![한대에는 무덤 안 벽돌에도 무(武)를 숭상하는 그림을 남겼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10_700.jpg)
그중 4번은 장군으로 나서서 흉노군 11만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주목하는 점은 곽거병의 리더십이다.
첫째, 곽거병은 뛰어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공정히 배치했다. 발탁한 조파노는 유목민 출신으로 흉노에서 살다 한나라로 귀순했다. 조파노는 곽거병이 올린 장계에 따라 작위를 받았고, 훗날 장군까지 되어 활약했다.
둘째, 곽거병은 전쟁터 상황에 맞춰 전술을 펼치는 '언제나 이기는 장군'이었다. 실제로 임기응변의 달인으로 전장을 고려하여 수시로 전술을 바꿔가며 전투를 벌였다.
![곽거병묘의 마답흉노(馬踏匈奴)상. 곽거병은 죽어서도 흉노를 제압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11_700.jpg)
셋째, 곽거병은 논공행상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했다. 위로는 장수부터 아래로는 말단 군졸까지 전공을 기록해서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공평무사한 일처리 덕분에 휘하 장수와 병사 대부분은 승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상승장군 밑에서 전투에 이기고 전공도 챙길 수 있었기에 누구나 곽거병 휘하로 들어가기를 갈망했다.
이런 곽거병의 기질을 보여주는 고사가 있다. 곽거병이 간쑤성에서 큰 공을 세우자, 한무제는 어주 한 병을 보내주어 승전을 축하했다. 병사들은 전투에서 이겼으나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곽거병이 술을 부은 샘터는 한나라 때부터 성역화했다.](https://img.sbs.co.kr/newimg/news/20250116/202030412_700.jpg)
이에 곽거병은 진영 앞 샘터로 병사를 불러 모았다. 술병을 높이 들고 "이 술은 황제께서 너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하셨으니 우리 모두 함께 마시자"고 외쳤다.
그리고 술을 샘물에 쏟아부었다. 곽거병이 먼저 바가지에 떠서 마셨고 병사들이 돌아가며 샘물을 마셨다. 곧 군영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뒤이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고작 한 병의 술로 타이밍을 잡아 군심을 움직인 것이다.
이 고사의 현장이 주취안(酒泉)이다. 주취안이라는 지명은 B.C. 106년에 한무제가 곽거병을 기리어 지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