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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에 관한 회고록을 썼더니…독자들에게서 받은 놀라운 편지들 [스프]

김민표 D콘텐츠 제작위원

입력 : 2025.01.03 09:00|수정 : 2025.01.03 09:00

[뉴욕타임스 칼럼] I Wrote a Memoir About Grief. That Was the Beginning, by Sloane Crosley


0103 뉴욕타임스 번역
 

* 슬론 크로슬리는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다. 최근 저서로는 "사람을 위한 애도(Grief is for People)"가 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가장 놀랐던 건 편지의 길이였다.

에세이집을 몇 권 펴냈고, 그때마다 독자들은 내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잘 읽었다는 칭찬과 감사의 말도 있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에 털어놓기도 했다. 의도치 않게 실례를 범하는 이도 있었고,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독자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쉬이 드러내기 어려운 면들을 내 글에서 발견하고는 자기도 그럴 때가 있다며 일종의 동지애를 표했다. 그런 편지들을 많이 읽었다고 소위 낯짝이 두꺼워지진 않았다.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그래도 이제는 어떤 지적들은 무던히 흘려보낼 수 있게 됐다. 나름대로 내 몸 어디에 굳은살이 박였고, 어디는 아직 피부가 무른지 잘 알게 됐달까?

그런데 이번 책을 내고 나서 받은 편지들은 사뭇 달랐다. 이번에 낸 책은 자살로 목숨을 잃은 친구를 떠나보낸 뒤 쓴 회고록이다.

이번 편지들에는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말이 단 한 줄도 없었다.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말은 물론이고, 충고나 조언도 없었다. 나는 원래 스스로 자기 능력을 확신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들 조언을 구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편지에는 어쨌든 그런 종류의 부탁이 없었다. 일종의 신호탄 같았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든 이메일이든 글은 순수한 상실감으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이 참고삼아 읽어보라며 주로 부고와 같은 슬픔 가득한 글들을 첨부했다. 부모님, 형제자매, 친구까지 잃어버린 대상도 제각각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이도 있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경우도 있었지만, 상실의 시기와 무관하게 글에는 생생한 고통이 절절히 묻어났다.

책을 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루 평균 8통 정도의 편지나 이메일을 받던 때도 있었다. 나는 원래 누군가를 돕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책을 읽은 사람이 매일 8명씩 내게 글을 보내는 상황은 매우 낯설고 놀라웠다. 편지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는 내 책의 성공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없다. 대신 내가 이렇게 많은 편지를 받았다는 건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죽음으로 (특히 자살로) 잃을 때 느끼는 정서적인 고통을 어떻게 덜어낼지 몰라 다들 힘들어한다는 방증이며, 사람들이 떠난 이를 솔직하고 잘 애도하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라도 배워야 한다.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살 관련 최근 통계인 2022년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자살로 4만 9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1년 전 4만 8천100명보다 늘었다. 특히 자살에 관한 통계가 가리키는 숫자는 언뜻 와닿지 않을 거다. 이 숫자가 반으로 줄든 두 배로 늘어나든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거다. 그래서 이게 많은 건가? 아니면 적은 건가? 또 통계가 어떻든 그게 나한테 소중한 사람과 나의 상실감과는 무슨 관계람?

제도적으로는 많은 것이 갖춰져 있다. 자살예방전화 988 (옮긴이: 우리나라는 국번 없이 129) 등 자살 생각이 드는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주기 위해 제도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매일같이 이 문제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눈 결과 자살 생각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얼굴을 맞대지 않고 도움받을 수 있는 상담전화 번호를 알려주는 것 외에 제도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더 중요한 건 개개인의 몫이다. 자살 생각이 들거나 애도하는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어떻게 도움을 줄지 확실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

나는 자살로 사망한 전 직장 상사와의 우정, 상실의 슬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회고록을 출간했다고 해서 글을 쓰기 전보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떤 권위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내게 가르침을 준 건 독자들의 편지였다. 우리가 이 문제를 충격에 꼼짝도 못 하거나 당혹감에 쉬쉬하지 않을 수 있는 의식의 최전선에 놓지 않는 한 위험은 두 갈래로 악화될 것이다. 즉, 침묵 속에 자살 생각으로 고통받던 이들은 더욱더 죽음으로 내몰리고, 소중한 이를 잃고 슬퍼하는 이들은 제대로 애도하는 법을 영영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보통 예방과 치유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대화를 꺼리고 거부한다. 자살 생각을 비롯한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까 봐, 또는 완벽하게 애도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

한 번은 아는 작가에게 독자들의 편지에 서툴게 어설픈 답변을 보내거나 독자들과 소통하려다 괜히 여기에 압도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쓸 때야 발언권이 궁극적으로 나한테 있지만, 책을 펴낸 뒤에는 그 발언권이 독자에게 있는 게 당연한 거지 뭐. 저자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편지들은 내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이나 답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첫 직장에서 겪은 좌충우돌 성장기나 가슴 아픈 사연을 쓴 이도 없었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책의 내용에 반응하기보다 책을 읽고 하게 된 생각을 정리해 편지에 담았다. 한결같은 외로움과 무력감이 느껴졌다. 책이라는 매체의 특징 덕분에 처음부터 닫혀서는 안 됐던 방의 문을 독자들 스스로 열고 들어간 듯했다. 슬픔에 빠져 편지를 쓴 이들은 자신의 참담한 심정과 분노를 누군가 알아주길 원했다. 무엇보다도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 빠진 이들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져서는 안 됐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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