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복판에서 영화 같은 총격 살해극이 벌어졌다. 흔히 '뉴욕에서'라고 보도되는 총격 사건들 중에는 외곽 우범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은 달랐다. 정말로 맨해튼 비즈니스 구역 한복판, 기업인과 관광객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었다.
처음에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피해자의 신원이 알려진 뒤였다. 총을 맞고 숨진 사람은 유나이티드헬스그룹 보험 부문의 CEO. 대표적 '민영 의료' 국가인 미국의 최대 의료보험회사 최고경영자였다.
온라인에선 피해자를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죽을 만했네', '사필귀정',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식의 반응이 확산됐다. 한 프리랜서 언론인은 '기쁨을 느꼈다'고 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뉴욕경찰(NYPD)이 살해 용의자의 CC-TV를 공개한 뒤에는 총격범을 영웅시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를 현대판 로빈훗이나 현실판 배트맨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어올리는 게시물이 소셜미디어에 넘쳐났고, 수만 달러의 모금액이 답지했다. 도피 중 패스트푸드점에 들른 그를 경찰에 신고한 사람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어쩌다가 미국이 살인자를 영웅시하고 피해자를 조롱하는 사회가 됐느냐는 개탄이 나오는 한편으로, 미국의 의료체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으면 대중이 그런 반응을 보이겠냐는 분노한 목소리가 넘친다.
왜 하필 그 회사 CEO가 목표물이 됐을까
브라이언 톰슨(50)은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보험 부문 대표다. 그는 지난 4일 수요일 오전 6시40분쯤, 주주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맨해튼 미드타운 힐튼호텔에 가다가 호텔 앞길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뉴욕현대미술관(MoMA), 록펠러센터 등이 가까운 곳이었다.
회사 측은 미네소타주 본사에 조기를 게양하는 한편, 페이스북 계정에 톰슨을 추모하는 게시물을 올렸다. 거기엔 이틀 만에 8만 2천 개의 반응이 달렸다. 그중 7만 6천 개가 '웃겨요'였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후 회사 측은 해당 추모 게시물에 대한 반응 숫자를 볼 수 없도록 조치했다.
브라이언 톰슨이 유나이티드헬스의 보험 부문 CEO로 임명된 건 2021년이다. 그가 경영을 맡은 뒤 이 회사의 이익은 같은 해 120억 달러(약 17조 원)에서 지난해 160억 달러(약 23조 원)로 증가했다. 지난해 보험 부문에서 기록한 매출만 해도 2천810억 달러(약 398조 원)에 달했다.
가입자에게서는 돈을 더 거두고, 청구가 들어왔을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깎거나 지급을 거절한 덕분에 회사에 이익이 쌓인 것이다. 유나티이트헬스의 보험 지급 거부율은 33%로 가장 높다. 다른 의료보험사들의 거부율은 20%대거나 그 이하다.
치료받기 전에 보험사에 미리 허락을 받지 않았다, 치료를 한 병원이나 의사가 자신들과 계약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등등, 보험금 지급 거절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로 인해 의료비 부담으로 가계가 파산하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아 대중의 원성이 쌓였다.
레딧(Reddit), 스레드(Threads), X 등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에는 의료 소비자들의 보험사에 대한 분노가 쏟아지고 있다. LA의 딘 피터슨은 스레드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유나이티드는 그들이 사전 승인했던 심장 수술에 대해 14만 3천 달러(한화 2억 600만 원)를 청구했다. 그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2년을 싸워야 했고 그동안 내 신용점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워싱턴포스트가 내 사례를 기사로 다룬 뒤에야 해결됐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노인들이 상해나 질병 치료 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료비에 대한 유나이티드헬스의 지급 거절이 2020년 10.9%에서 2022년 22.7%로 늘었다. 전문적 요양시설 입원 치료에 대한 지급 거절은 2022년 12.6%였는데 이는 2020년 대비 9배나 늘어난 것이며, 애트나(Aetna) 휴마나(Humana) 등 다른 보험사들도 패턴이 비슷하다고 WP는 보도했다.
이런 과정에서 유나이티드헬스 등 보험사들은 불완전한 AI와 오류가 많은 알고리즘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민사소송에서 제기됐다.
수술 중에 시간 넘기면 그때부턴 마취 풀려도 참으라고?
이번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보험금 지급을 줄이려는 또다른 보험사의 꼼수가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앤섬 블루크로스 블루쉴드(이하 앤섬으로 약칭)는 내년 2월부터 뉴욕, 코네티컷 등 일부 주에서 수술 중 마취에 대해 일정 시간까지만 보험 커버를 해주겠다는 정책을 조용히 내놨다. 마취과 의사들이 청구하는 액수가 너무 많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의사들과 환자단체 등이 격렬히 반발했다. 수술을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로 길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그럼 수술하다 말고 마취를 중단하란 말이냐는 것이다. 뉴욕 주지사 등 정치권까지 나서서 보험사를 맹비난했다. 결국 앤섬 측은 지난 5일, 해당 방침을 철회했다.
브라이언 톰슨 유나이티드헬스 CEO가 총을 맞고 숨진 다음 날이었다.
명문대 출신의 '금수저 훈남'... 대중 놀라게 한 범인의 정체
총격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 루이지 만조니(26). 그는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한 사립고등학교를 수석졸업했고, 아이비리그 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유펜)에서 컴퓨터공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집안은 볼티모어 일대에 골프장을 여러 개 소유한 부동산 재벌이다. 배경만 보면, 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해 큰 부를 이루거나 집안 사업을 물려받아 트럼프처럼 부자가 될 수도 있는 금수저 청년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2022년에는 하와이에 머물며 서핑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는데, 그때 무리해서 허리가 더 나빠졌고 2023년에는 수술을 받았는데도 낫지 않았다고 한다. 통증이 심해지면 며칠씩 두문불출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6개월 전부터는 가족 친척은 물론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건 발생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 경찰에 아들 실종 신고를 냈다.
체포 당시 만조니의 배낭에는 범행 동기를 담은 선언문이 있었다. 선언문에서 그는 "갈등과 트라우마를 일으킨 것을 사과하지만, 해야만 할 일이었다"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미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제대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해 상대적으로 일찍 죽는데, 이는 기업들의 지나친 이윤 추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쏜 총알의 탄피에는 Defend(방어), Deny(부인) 등의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단어들은 미국 의료보험 산업을 파헤친 2010년 책 <지연, 부인, 방어: 보험사들은 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가,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연상시킨다.
남플로리다대학의 범죄학 교수 브리아나 폭스는, 만조니가 스스로를 "사람들을 대변해 정의를 구현하는 배트맨 타입의 인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CNN에 말했다.
총격범 영웅시하는 대중... 급기야 '기쁨 느꼈다'까지
루이지 만조니가 자경단식 정의 구현에 나선 것이라고 보는 대중은 그를 영웅으로 추어올리는 분위기다. 온라인에는 #FreeLuigi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봇물을 이루고, "그가 유죄라면 핫한 죄뿐"이라는 식의 글도 많다. 범죄 및 도주 과정에서 CC-TV에 찍힌 그가 입은 아우터 자켓은 메이시 백화점 온라인에서 수백 벌이 팔리며 완판됐다.
그의 얼굴 이미지를 넣은 티셔츠를 만들어 파는 업자들도 많다.
모금 사이트 '기프 펀드 고'에는 루이지 만조니의 법률 비용을 지원하자는 모금 캠페인이 올라왔는데, 사흘 만에 7만 달러가 넘는 돈이 모였다. (20만 달러를 목표액으로 진행 중이다.)
전 뉴욕타임스(NYT) 기자이자 전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였던 테일러 로렌즈(Taylor Lorenz)는 유명한 방송 진행자 피어스 모건과의 인터뷰 <Uncensored (심의되지 않은)>에서, 루이지 만조니의 범행을 보고 '기쁨(Joy)'을 느꼈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로렌즈가 "불행하게도, 다른 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기쁨을 느꼈다"고 말하자 피어스 모건은 "사람이 처형당하듯 죽었는데, 그게 말이 되는 반응이냐"고 반발했다. 로렌즈는 "탐욕스러운 보험회사 경영진들이 미국인들에게 보험금 지급을 거부해 그들을 죽게 만들고 있지 않느냐"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보험사 경영진들이 모두 죽어 마땅하다는 건 아니지만 이번 사건이 의료보험 체계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로렌즈는 이미 자신의 온라인 플랫폼에 <우리는 왜 보험사 경영진들이 죽기를 바라는가("why 'we' want insurance executives dead.")>라는 글을 써서 논란을 일으킨 상태였다.
"계급의 배신자"... 신고자에 대한 비난 폭주
루이지 만조니를 경찰에 신고한 사람에 대한 비난 여론도 폭주했다. (만조니는 도주 중 펜실베이니아의 한 맥도널드 점포에서 식사를 하다가 직원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X 등 소셜미디어에선 신고자를 "계급의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글이 돌아다녔다. 구글 지도에는 해당 맥도널드 점포에 "쥐가 들끓는다"라거나 "마약 먹은 사람이 일하는 곳"이라는 등의 악플이 달리고 평점 테러가 벌어져, 구글 측이 문제 리뷰들을 삭제하는 조치에 나서야 했다.
이런 분위기는 반민주적이고 반문명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지식층의 고급 교양지 <뉴요커>는 "사람이 총을 맞고 죽었는데 그게 웃을 일이냐"며 칼럼을 썼다.
만조니가 체포된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지사인 조시 샤피로도 신고자 보호에 나섰다. 한때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할 민주당 차기 주자로 유력시되기도 했던 그는, 이유 있는 분노라도 선을 넘으면 광기가 된다는 취지로 대중의 자제를 호소했다.
샤피로 주지사는 지난 9일, 만조니가 검거된 타운을 찾아 연설하면서 "온라인의 어두운 구석에서, 이 살인자가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다. 진정한 영웅은 오늘 아침 맥도널드에서 911에 신고 전화를 건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를 해결하거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사람들이 우리의 헬스케어 시스템에 대해 갖고 있는 진정한 좌절을 이해한다. 그러나 불법 유령 총기를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그런 행위를 관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문명화된 사회라면 그렇다. 이념을 강하게 신봉하는 사람이 자경단식 정의 구현에 나설 때, 우리 모두는 덜 안전해진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