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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전설의 선수가 7전 7패…비운의 2인자 만든 '황제' [스프]

권종오 기자

입력 : 2024.11.23 09:02|수정 : 2024.11.23 09:02

[별별스포츠+] '황제' 야마시타 넘지 못한 '전설' 사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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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하늘은 주유를 낳고서, 왜 제갈량을 낳았는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주유가 끝내 제갈량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됩니다.

1980년대 세계 유도에 제갈량과 주유 같은 선수 2명이 동시대에 출현했습니다. 일본 유도의 황금기를 이끌며 세계 유도 최중량급을 제패했던 두 전설, 일본의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사이토 히토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올림픽 2연패에 빛나는 사이토 히토시

지금은 유도 최중량급이 100kg 이상급 하나입니다. 그런데 두 선수가 활약했던 1980년대에는 95kg 이상급이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무제한급'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 있었습니다. '무제한급'은 말 그대로 체중 제한 없이 60kg 선수도, 150kg 선수도 출전하는 체급이었습니다. '무제한급'이 있었기 때문에 야마시타, 사이토 둘이 각각 다른 체급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나란히 우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두 선수는 1980년대 일본 유도를 이끌었던 쌍두마차로 숱한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사이토 히토시는 1961년생으로 야마시타 야스히로보다 4살 어린 후배입니다. 1984년 LA, 1988년 서울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던 전설입니다. 이 선수의 아들이 지난 파리 올림픽에 출전해 일본 유도 사상 첫 '부자(父子) 올림피언'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최중량급인 100kg 이상급 준결승에서 우리나라의 김민종 선수와 대결했는데, 김민종이 시원한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일본 '노골드' 위기 탈출시킨 주역

사이토 히토시는 1984년 LA 올림픽에는 95kg 이상급으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야마시타는 이 대회 무제한급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무제한급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이토는 95kg 이상급에 출전했습니다. 이때는 야마시타가 은퇴해 일본 방송국 해설위원으로 중계석에서 사이토의 경기를 해설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사이토가 받은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시 일본 유도는 마지막 날까지 금메달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도 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극도의 부진을 보인 것입니다. 유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노골드의 수모를 당할 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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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도 경기 마지막 날 치러진 95kg 이상급의 사이토에게 전 일본 국민의 기대가 쏠렸는데 준결승이 최대 고비였습니다. 상대는 우리나라의 조용철. 당시 한국 유도 최중량급의 간판스타로 현재 대한유도회 회장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95kg 이상급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은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사이토에 팔꺾기로 기권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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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결승전이라 할 수 있는 두 라이벌의 준결승은 팽팽했습니다. 득점 없이 맞선 경기 막판 '그쳐' 상황에서 사이토가 중계석의 야마시타를 쳐다봤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잠시 눈빛을 교환했는데 훗날 두 사람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이토가 "누가 이기고 있는 거 같나요?"라고 눈빛으로 물어봤고, 야마시타는 "당신이 이기고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난적 조용철을 꺾은 사이토는 결승에서 동독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하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사이토는 세계선수권에서는 1983년 무제한급에서 한 차례 우승을 기록했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95kg 이상급에서 금메달을 손에 쥐었습니다. 탁월한 유연성을 바탕으로 시원시원한 유도를 구사했는데, 1984년 LA 올림픽 때는 4경기 중 결승전만 빼고 3경기에서 한판승,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5경기 중 3경기를 한판승으로 따냈습니다.
 

야마시타엔 7전 7패, 한 맺힌 사이토

일본은 '왕중왕', '꽃 중의 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던 무제한급을 더 중시했습니다. 야마시타와 사이토는 LA 올림픽에 출전할 일본 대표를 뽑는 선발전에서 나란히 무제한급에 출전했습니다. 접전 끝에 야마시타가 우세승을 거두고 무제한급 대표로 선발됐는데 당시 사이토가 판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논란이 일자 일본유도연맹은 사이토를 95kg 이상급 대표로 선발하며 무마하기도 했습니다.

두 선수의 진검 대결은 전(全) 일본 유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벌어졌습니다. 당시 일본 선수들은 이 대회 우승이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전 체급을 통틀어 일본 유도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이토도 올림픽보다 전 일본 선수권 우승 타이틀을 더 가지고 싶었다고 말해왔습니다. 야마시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목된 사이토는 야마시타를 존경했지만, 반드시 그와 맞대결해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함께 금메달을 따고도 야마시타가 일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며 내심 서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일본 선수권을 제패해야 야마시타를 넘고 진정한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선수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결승에서 대결했습니다. 1983년 결승에서 야마시타가 잡기 싸움에서 사이토를 압도했습니다. 사이토가 주특기인 메치기 기술을 시도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1년 뒤 1984년 대회 결승에서 야마시타는 또다시 사이토를 물리쳤습니다. 야마시타가 LA 올림픽에서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우승한 이후 대부분 그가 은퇴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야마시타는 이듬해 1985년 전 일본 선수권에 출전하기 위해 은퇴를 미뤘습니다. 사이토를 꺾고 전 일본 선수권 우승 타이틀을 지킨 채 은퇴하는 것을 선수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세운 것입니다.

사이토로서도 야마시타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야마시타의 주특기인 밭다리 후리기에 대비한 비장의 기술을 집중 연마했습니다. 야마시타가 밭다리 후리기를 시도할 때 중심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순간적으로 되치기 하는 기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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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수는 1985년 대회 결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밭다리 후리기 기술을 시도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4분여가 흘렀을 때 드디어 그 순간이 왔습니다. 사이토의 번개 같은 되치기에 야마시타가 뒤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심판은 점수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가 슬립, 즉 스스로 미끄러져 넘어간 것으로 간주해서 당시 규정에 따라 점수로 인정 안 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토는 넘어지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쳐 이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시타가 적극적인 공격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경기가 종료됐고, 결국 야마시타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야마시타는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고 정상에서 명예롭게 은퇴한 반면 사이토는 3년 연속 결승에서 야마시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은퇴한 지 3년이 지난 1988년, 평생 숙원이었던 전 일본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 일본 선수권을 포함해 사이토는 야마시타와 총 7차례 맞대결을 펼쳤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매 경기 치열한 접전이었지만 정말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1985년 대회 결승은 일본에서 전설의 명승부로 길이 남았는데, 야마시타는 훗날 인터뷰에서 "심판이 사이토의 승리를 선언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기"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야마시타가 사이토의 되치기에 넘어갔을 때 점수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야마시타가 이득을 본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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