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근대5종 여자 결승전 레이저런에서 질주하는 성승민
도쿄 올림픽 전웅태의 사상 첫 메달에 이은 파리 올림픽 성승민의 여자 선수 첫 메달! 76년 역사의 한국 근대5종은 경기력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올림픽은 물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에서도 전웅태를 비롯해 서창완, 성승민, 김선우 등이 번갈아 메달을 따내며 세계 최정상급 기량을 뽐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의 경기력이 감탄의 느낌표를 자아내는 반면, 대한근대5종연맹의 행정은 의문의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겉으로 알려지지 않은 대표 선수단과 연맹의 마찰, 대표 선수단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의사 결정, 여기에 각종 비리 의혹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곪아가고 있는 한국 근대5종의 문제점과 황당한 사건을 연속 보도를 통해 짚어봤습니다.
파리에서 생긴 일…렌터카 타고 가다 출전도 못할 뻔
파리 올림픽 근대5종 첫 경기, 펜싱 남자부 랭킹 라운드가 열린 8월 8일 오전, 근대 5종 대표팀은 아찔한 순간을 맞았습니다.
올림픽 선수촌에서 묵는 다른 나라 선수단은 대회 조직위에서 제공한 공식 차량을 이용해 10여 km 정도 떨어진 경기 장소, 노스 파리 아레나로 1~20분 만에 이동했지만, 우리 대표팀은 경기장에서 40km 이상 떨어진 숙소에서 올림픽 전용 도로를 이용할 수 없는 일반 렌터카를 타고 이동하느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발목을 잡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공식 차량이 아닌 일반 차량은 경기장에 주차할 수도 없어 자칫하면 경기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도 못할 뻔했는데, 다행히 중간에 파리 경찰차를 본 우리 선수단이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해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경기 시작 30분 전 간신히 경기장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1시간 가량 늦게 도착한 우리 선수들은 헐레벌떡 펜싱복으로 갈아입고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꿈의 무대, 가장 중요한 결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펜싱 랭킹 라운드에서 25승 정도를 목표로 잡았던 전웅태는 22승, 서창완은 20승에 머물렀습니다.
(출전 선수 전원이 한 번씩 맞대결을 펼치는 펜싱 랭킹 라운드의 점수는 준결승과 결승전 점수에 모두 반영됩니다. 선수당 35경기(전체 36명 출전)를 치르고 1승당 포인트가 5점씩 좌우되기 때문에 최종 성적에 가장 영향이 큰 종목으로 꼽힙니다. 예를 들어 랭킹 라운드에서 3승만 더해도 15점이 높아져 마지막 순위를 결정하는 준결승이나 결승전의 레이저런 때 15초 먼저 출발할 수 있습니다.)
'선수단 의견은 관심 없다'…연맹 독단으로 선수촌에 못 들어간 선수들
만약 경찰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수년을 준비한 올림픽에 출전도 못할 뻔했던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까지 근대5종 대표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됐습니다.
취재 결과 대한근대5종연맹은 파리 올림픽 선수촌 입촌 여부에 대해 선수단에 한 번도 질문이나 상의는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입촌하지 않는 것을 결정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당연히 선수촌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다가 올림픽 개막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5월 말 파리 선수촌에 입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듣게 된 대표팀 최은종 감독은 연맹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연맹은 이미 신청 기한이 지나서 선수촌 입촌은 할 수 없으니 연맹이 예약한 호텔을 사용하라고 통지했습니다.
경기 하루 전 경기장과 먼 곳으로? 메뚜기 신세 된 선수들
선수촌 대신 대한근대5종연맹이 예약한 호텔의 위치도 문제였습니다. 연맹이 잡은 곳은 파리 올림픽 근대5종 종목 공식 호텔이긴 하지만, 준결승과 결승전을 위한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 인근의 호텔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은 준결승과 결승에 앞서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파리 북쪽의 공식 훈련장과 펜싱 랭킹 라운드 경기장 사용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연맹이 예약한 호텔을 이용할 경우 선수들은 매일 길에서 몇 시간씩 허비하며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을 게 뻔했습니다. 이 때문에 선수단이 문제를 제기하자 연맹은 훈련장 인근에 일단 숙소를 잡아줬습니다.
새롭게 잡은 숙소는 우범 지대에 위치한 데다 웨이트장도 없어서 선수들은 하루 한 번 공식 훈련장의 제한된 훈련 시간 이외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도, 야외에서 가벼운 달리기로 몸을 풀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동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던 대표팀은 연맹 예산 탓인지, 아니면 다른 속내가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펜싱 랭킹 라운드 경기 하루 전날(8월 7일) 베르사유 인근 연맹이 처음 예약한 호텔로 숙소를 옮겨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경기를 하루 앞두고 짐을 싸서 경기장 반대쪽,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겁니다.
최소한 이동일을 하루만 늦춰 펜싱 랭킹 라운드를 치른 뒤 베르사유 근처 호텔로 이동했더라도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이 조금은 나았을 겁니다.
12명의 대표팀에 9인승 차량 1대…운전은 코치의 몫!
더구나 연맹은 선수단 11명(지도자 7명, 선수 4명)에 통역을 담당하는 연맹 직원 1명까지 총 12명이 있는 대표팀에 운전 기사도 없는 9인승 렌터카 1대만 지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훈련장과 경기장, 식당 등으로 이동할 때 9명이 벤 차량(승마 담당 코치가 직접 운전)으로 이동하고 나머지 선수단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 펜싱 랭킹 라운드 경기 전날 숙소를 먼 곳으로 옮기면서, 경기 당일 올림픽 전용 레인을 탈 수도 없고, 경기장 출입도 안되는 차량을 대표팀 코치가 운전해 거리도 멀고 꽉 막히는 초행길을 찾아가야 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근대5종 선수단이 올림픽 선수촌에만 입촌했다면 이 모든 문제가 애초에 생길 게 아니었습니다. 선수촌은 공식 훈련장이나 펜싱 랭킹 라운드가 열리는 노스 파리 아레나와 멀지 않고, 공식 차량을 이용할 수 있어 올림픽 전용 레인을 타고 베르사유까지도 3~40분 내에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시설 좋고 안전한 장소에서 언제든 연습하며 컨디션 조절도 훨씬 용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국가의 근대5종 선수단은 모두 선수촌에 입촌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만 제외하고….
"체육회 실수지만 증거 없어", "선수촌이 더 불편해" 연맹의 황당 답변
연맹에 "애초에 선수촌 사용 신청을 하지 않았냐?"고 물어봤습니다. 연맹은 "대한체육회에 선수촌 사용 신청을 요청했지만, 체육회가 실수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문서화하지 않아 증거는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대체 올림픽 선수촌 사용 같은 중요한 업무를 어떻게 구두로 신청하는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만약 구두로 요청했더라도 체육회 실수라면 체육회에 책임을 물어야 했고, 연맹 실수라면 담당자를 문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습니다.
선수단에게 의견을 묻지 않은 이유도 물어봤습니다. 연맹측 답변은 장황했는데, 요약하면 '김성진 코치에게 선수촌에 대해 먼저 얘기했고, 선수단 의견을 반영해 숙소를 결정했다'는 답이었습니다. 구차한 핑계에 가까웠습니다. 취재 결과 연맹 담당자가 김성진 코치에게 먼저 말한 건 맞지만 그건 의견을 물은 게 아니라 앞에서 얘기했듯 '선수촌을 못 쓴다'고 올림픽 개막 2달도 안 남긴 5월 말에 알려준 것뿐입니다. (이를 들은 김성진 코치는 곧바로 최은종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에 내용을 전달했고, 최은종 감독이 "선수촌 입촌은 경기력과 직결된다"며 강력하게 연맹에 항의했지만, 연맹에서 제대로 된 답변도 듣지 못했습니다.)
랭킹 라운드 경기 전날 멀리 떨어진 숙소로 이동한 이유에 대한 질문에는 "누가 제안한 건지는 모르지만(?) 선수단과 상호 조율해 숙소를 이동했다"는 추상적인 답변과 함께 "파리 선수촌은 문제도 많고, 모든 선수촌이 그렇듯 선수촌에서 이동하려면 시간도 훨씬 더 걸리고 불편하다"고 추가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에는 체육회에 선수촌 사용 신청을 하려고 했다는 건지? 대한민국 근대5종 대표팀을 제외한 다른 나라 선수단이나 다른 종목 선수단은 불편한 걸 감수하고 선수촌에 들어갔다는 건지? 앞뒤가 안 맞고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나마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연맹의 답변은 12명이 있는 대표팀에 기사 없는 9인승 벤 한 대만 지원한 이유가 "기사를 고용하거나 12인승, 15인승 차량을 빌릴 경우 가격이 너무 비쌌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렌터카비나 호텔비를 따로 쓰지 않고 돈을 아끼려면, 정말 선수촌에 들어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피해는 오롯이 선수들에게…
근대5종연맹에 대한 취재를 하며 전웅태 선수를 만나 올림픽 선수촌에 입촌하지 못한 게 경기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봤습니다. 전웅태 선수는 결과에 대한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답했습니다.
"
올림픽 선수촌에 가면 그 곳이 좋든 안 좋든 간에 '올림픽에 왔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상황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더 좋은 퍼포먼스가 나옵니다. 제가 (제) 결과에 이 내용을 연관 짓고 싶지 않아서 세세한 것까지 얘기할 수 있지는 않지만, 감독님께서 (연맹의 결정으로 선수촌에 못 들어간다고) 얘기해 주셨을 때
'선수들 또한 그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었다'라고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cf) 대한민국 근대5종 대표팀 2024 파리 올림픽 일정
7월 29일 |
출국, 대한체육회의 프랑스 퐁텐블로 베이스 캠프(CNSD) 입 |
7월 29일~8월 4일 |
퐁텐블로 베이스 캠프(CNSD) 자체 훈련 |
8월 4일 |
베이스 캠프(CNSD) -> 급하게 잡은 훈련장 인근 숙소로 이동 |
8월 4일~7일 |
공식 훈련장에서 하루 한차례 훈련 (숙소에서는 훈련할 수 없는 여건) |
8월 7일 |
훈련장 인근 숙소 -> 베르사유 인근 호텔로 이동
펜싱 랭킹 라운드 전날 경기장 반대쪽 숙소로 이동 |
8월 8일 |
베르사유 인근 호텔에서 40km 이상 떨어진 경기장으로 렌터카로 이동
우여곡절 끝에 경기장에 도착해 펜싱 랭킹 라운드 경기 |
8월 9일~11일 |
베르사유 경기장에서 남녀 준결승, 결승 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