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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유령"…가명·대포폰 쓴 '암구호 담보대출' 사채업자들

류희준 기자

입력 : 2024.10.02 11:17|수정 : 2024.10.02 11:17


"사실상 유령이나 다름없었어요. 아예 흔적이 없었다니깐요."

군 간부들에게 군사 3급 비밀인 암구호(아군과 적군 식별을 위해 정해 놓은 말)를 담보로 급전을 빌려준 사채업자들은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가명에 대포폰, 차명계좌까지 돌려쓰며 범행을 뒤쫓는 군과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을 오랜 기간 따돌렸습니다.

전북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5월 20일 군 정보수사기관인 국군 방첩사령부는 경찰에 민간인 신분인 대부업자들에 대한 공조수사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방첩사는 모 부대 대위급 간부로부터 암구호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신원미상의 사채업자' 존재를 확인한 상태였습니다.

해당 간부는 올해 1월 상황실의 암구호 판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한 뒤 그 사진 파일을 사채업자에게 보내주고는 2회에 걸쳐 모두 100만 원을 빌린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경찰은 통신·계좌 영장을 집행해 사채업자들의 실체를 들춰내려고 했으나 이내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사채업자들이 군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은 휴대전화는 등록자 명의와 사용자가 다른 이른바 '대포폰'이었고, 돈을 송금한 통장 또한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린 차명계좌였습니다.

심지어 군 간부들이 기억하는 사채업자의 이름도 대부·대부중개업에 등록되지 않은 가명이었습니다.

경찰은 포기하지 않고 사채업자들이 휴대전화를 쓴 기지국 기록 등을 단서로 수사를 이어가 공조수사 요청 40여 일 만인 7월 4일 대부업체 직원을 붙잡아 구속했습니다.

이후로도 경찰은 검찰, 방첩사와 유기적인 협조로 8월 10일에는 또 다른 대부업체 직원을 구속했고, 마침내 9월 5일에는 검찰과 함께 범행을 총괄한 불법 대부업자 A(37) 씨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그동안 군 내부에서 소문만 무성했던 '암구호 담보대출'의 베일이 한 꺼풀 벗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사채업자들의 정체를 들춰내기 위해 여러 차례 압수수색과 탐문 수사, 잠복근무 등을 이어갔다고 설명했습니다.

증거물로 확보한 대포폰만 33대에 달했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는 디지털포렌식 작업도 상당 기간 걸렸습니다.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 또한 A 씨 등이 연루된 불법대부업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고, 또 다른 군사기밀을 유출한 부사관 2명에 대한 사건을 방첩사에 이첩했습니다.

또 인터넷 도박·코인 투자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군 간부들에게 암구호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 A 씨 등 3명을 재판에 넘겼습니다.

군과 검경의 끈끈한 공조 덕에 자칫 국가안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전례 없던 사건을 신속하게 해결한 것입니다.

전북경찰청 관계자는 이 사건 수사는 피의자들에 대한 신원 정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아 어느 때보다 어려움이 많았다며 끈질긴 탐문과 압수물 분석으로 피의자를 특정하고 구속에 이르렀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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