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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이 진보를 망쳤다고? '정체성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나 [스프]

전형우 기자

입력 : 2024.09.28 09:01|수정 : 2024.09.28 09:01

[뉴스쉽] '정체성 정치'의 흥망성쇠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 2010년대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 성 차별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워크(Woke, 깨어있음)'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 여성, 흑인, 성소수자, 장애인 같은 집단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를 '정체성 정치'라고 하는데, 미국 민주당에서 정체성 정치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 점차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워크' 운동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뺏는다는 반발이 커졌고, 결국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 최근 미국 진보 진영에서는 트럼프 당선에 대한 반성으로 '정체성 정치'보다는 다시 경제 문제, 부의 재분배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전형우 뉴스쉽 썸네일
몇 주 전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Ye)가 방한해 리스닝 파티를 연 것이 화제가 됐다. 국내 힙합 팬들은 그가 예정에 없던 라이브로 74곡을 부른 것에 환호했지만, 카니예 웨스트는 미국에서 끝없는 설화를 일으켜 많은 이들에게 '캔슬(cancel, 팔로우 취소)'된 바 있다. 카니예 웨스트는 "히틀러와 나치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라거나 "흑인들이 노예가 되기로 선택했다"는 등 혐오 발언을 해 트위터(현 X)에서 여러 차례 정지됐고, 네티즌의 팔로우 취소는 물론 광고와 콜라보레이션이 줄줄이 끊어졌다.

카니예 웨스트의 사례처럼 미국에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쓴 사람을 비판하고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배척하는 '캔슬 컬처(취소 문화)'가 존재한다. 여성이나 흑인,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발언이 비판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당연히 체화되어야 할 덕목이 됐다.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조가 극단적으로 갔을 때 반발 또한 크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여성이나 흑인처럼 자신의 집단 정체성에 기반하는 '정체성 정치'가 중요한 이슈였다. 이번 뉴스쉽은 '정체성 정치'가 진보 진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다룬다.
 

'워크'와 '캔슬 컬처(취소 문화)'

미국에서 '워크(woke, 깨어있음)'라는 단어는 2010년대와 2020년대를 거치며 인기를 얻었다. 주로 진보 진영이나 인종 차별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2012년부터 시작된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와 함께 이 단어가 떠올랐는데, 2020년 흑인 남성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하자 BLM 시위는 극에 달했다. 워크는 인종 차별뿐 아니라 젠더 문제 등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워크가 인기를 얻으면서 대학이나 직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발언을 한 사람들은 매장당하거나 해고를 당했다. 혐오 발언이나 성희롱을 한 경우 비판을 받거나 징계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문제는 발언의 기준이 점점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잘못된 단어」의 저자 르네 피스터는 2020년대로 오면서 미국에서 혐오 발언의 범위가 넓어지고, 허용 한계선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조차 거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의 사례로 2020년 12월 시카고 일리노이대학 법학 교수인 제이슨 킬본은 강의에서 직장 내 차별을 다뤘다. 한 여성이 직장 동료에게 언어적 모욕을 당한 사례를 들면서 흑인에 대한 욕설을 "n......"이라고 축약했다. 그런데 법학과 흑인대학생회가 축약된 n 워드를 보기만 하는 것도 "정신적 테러"라고 항의했고, 대학은 킬본 교수를 임시 정직시켰다.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 트럼프 탄생시킨 민주당?

여성단체, 흑인단체 등 당사자 단체가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목소리 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역사적인 진보를 이끌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미국 민주당이 보편적인 갈등인 계급 문제, 불평등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정치'에 몰두하게 되면서 가져온 부작용은 존재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문제다.

트럼프라는 독특한 사람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건 기존의 지지층인 백인 노동계층이 민주당에서 트럼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의 이유로 꼽히는 건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다. 민주당이 다양성과 인종 문제, 젠더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면서 하층 노동자에게 심리적 반발을 샀다는 관점이다.

트럼프 직전의 대통령이자 민주당 대통령인 오바마는 당선될 당시 흑인 정체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백인 미국인이 겁을 먹지 않게 하려고 심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선거운동 중에 오바마는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를 비판하기도 했고 그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표를 구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 오바마는 대통령이 됐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즉, 오바마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흑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흑인 최초의 대통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에서는 보편적인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화법을 사용했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워크'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해시태그를 달고 '나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깨어있다'고 자만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누군가를 잘못됐다고 지적하는게 액티비즘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발전 과정에서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생긴다. 여성이나 흑인, 성소수자의 정체성 정치가 진보 진영에서 화두가 되면서 반작용으로 이에 비판적인 보수의 움직임이 나왔다.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게 지나치다, 오히려 여성이나 흑인 등 소수자가 더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백래시(backlash, 반동)'가 생겨났고, 이 흐름이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또 다른 반작용으로 '워크' 운동을 강화시켰다. 즉, 미국 정치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진보와 이에 질려버려 혐오 발언을 내뱉는 보수로 극단화됐다. 2015년 트럼프 당선 이후 미디어에서 워크 단어에 대한 언급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함께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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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트럼프는 여전히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고, "이민자가 개와 고양이 먹는다"는 혐오 발언을 하고도 당당하다. 진보 유권자 입장에서 트럼프는 마땅히 '캔슬'되어야 할 사람이지만, 트럼프는 미국 인구의 절반 가까운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워크' 운동은 정점을 지났다

2015년 트럼프의 대선 출마를 시작으로 트럼프 정부 내내 올라갔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관심이 2021년을 끝으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분석한 내용을 보면 대학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의견을 검열하고 비판하려는 시도가 2022년과 2023년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인종 문제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도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정점으로 2022년과 2023년에는 낮아지는 모양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의 미국 민주당이 '워크' 운동에 기반한 정책이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없고, 특정 인종과 관계없이 여러 인종의 연합으로 승리해 온 민주당에서 '워크'를 강조하는 건 선거적으로 무모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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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경제야"... 다시 계급 정치로

정치에서 전통적인 균열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가르는 데 있었다. 미국에서 1930년대 이후에는 공화당이 가진 이들, 기업을 주로 대변한다면 민주당은 서민, 일하는 사람의 편이었다. 부자와 서민 혹은 중산층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계급 정치'다.

1968년에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더 이상 계급 문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성 차별, 인종 차별 등 생활 속 다양한 이슈도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는데 이걸 '정체성 정치'라고 부른다. 2010년대의 미국 민주당이 정체성 정치에 집중하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반성은 다시 경제 문제, 그러니까 계급 정치로 우선순위를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가져왔다.

정체성 정치는 자신의 정해진 정체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분열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백인, 남성, 이성애자의 지지를 설득해내기는 쉽지 않은 점이 있다. 때문에 정당이라면 보편적인 계급의 문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내세우고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계층을 포섭하고 설득하려는 전략이 선거공학적으로도 유리하다.

지금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는 여성과 흑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부통령 시절 해리스는 이 점을 많이 부각시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최근 시카고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해리스는 "지구에서 가장 큰 특권인 미국인"이라며 "미국인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특정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고 미국인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또 눈에 띈 건 부통령인 팀 월즈와 전미자동차노조(UAW) 위원장인 숀 페인이었다. 교사와 풋볼 코치로 일했던 팀 월즈는 옆집에 한 명씩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백인 아저씨의 느낌이다. 해리스가 팀 월즈를 부통령으로 선택한 건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계층 표를 의식해서라는 분석이 많다. 자동차노조 위원장인 숀 페인이 전당대회에서 발언한 건, 지금 미국 민주당에서 노조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줬다.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60%가 넘는 미국인이 노조 활동에 긍정적이라고 응답해, 미국에서 노조는 1960년대 이후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2024년의 미국 민주당은 대선 승리를 위해서 정체성 정치보다는 계급 정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대선 캠페인에서 내걸었던 구호로 민주당이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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