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정치적 인간의 우화] 나의 충고가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는 이유 (글 : 양선희 소설가)
#1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려고 먼저 발 치수를 재서 자리에 놓아두었는데 시장에 갈 때는 놔두고 갔다.
신발을 다 보고 나서야 치수 잰 것을 놔두고 온 게 생각나 다시 돌아가서 그것을 가지고 다시 왔지만, 시장이 문을 닫아서 끝내 신을 살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왜 발에 직접 신어보지 않았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치수는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소."
#2
정현 사람 복자가 아내에게 바지를 만들라고 했다. 처가 물었다.
"이번 바지는 어떻게 만들까요?"
"내가 입던 낡은 바지처럼 하시오."
그러자 아내는 새 옷감을 훼손해서 낡은 바지처럼 만들었다.
#3
한 정현 사람이 수레의 멍에를 주웠다. 하지만 그 이름을 몰라서 사람에게 "이게 어떤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수레의 멍에"라고 알려주었다. 또다시 한 개를 주워 사람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것도 "수레의 멍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물어본 사람이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전에도 수레 멍에라 하더니 이번에도 또 수레 멍에라 하느냐. 그게 어찌 이렇게 많은가. 이건 네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와 싸움이 벌어졌다.
#4
연나라 재상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사람이 있었는데, 밤에 쓰다 보니 불이 밝지 않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등촉을 올리라(거촉)고 했다. 그러고는 편지에 '거촉'이라고 잘못 썼다.
그런데 연나라 재상은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말했다.
"등촉을 올리라는 것은 불빛을 밝히라는 뜻이고, 불빛을 밝힌다는 것은 현명한 사람들을 뽑아 임용하라는 것이다."
연나라 재상이 왕에게 말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고, 나라를 잘 통치했다. 잘 통치하긴 했지만, 편지의 본뜻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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