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정치적 인간의 우화] 말로는 가시나무 끝에 원숭이도 조각할 수 있다 (글 : 양선희 소설가)
#1
진나라 승상을 지낸 범저가 말했다.
“활이 부러지는 것은 반드시 그 마지막에 가서이지 처음에는 아니다. 대체로 활을 만드는 공인들은 활을 휠 때 삼십일 동안 틀에 넣어두었다가 줄을 걸 때에는 마구 밟은 뒤 하루 만에 시험 삼아 쏘아본다. 이것은 그 처음엔 신중하고, 마지막엔 거칠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부러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틀에는 하루만 넣어두고 시위를 밟은 지 삼십 일이 되어서야 시범적으로 쏘아본다. 이는 처음에는 거칠어도 끝에 가서 신중하게 하는 것이다.”
활 만드는 공인은 말이 궁해져서 그대로 하였더니 활이 부러졌다.
#2
아열은 송나라 사람으로 변설에 능한 자였는데, “흰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제나라 직하학당의 논변자들을 설복시켰다. 그러나 그가 흰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엔 말에 부과된 세금을 물었다. 허사로 점철된 공허한 말이라도 능히 한 나라를 이길 수 있다.
#3
나이가 많다고 싸우는 정나라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요임금과 동갑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황제의 형과 동갑이다.”
이걸로 소송까지 했는데 결론이 나지 않자 결국은 끝까지 우긴 자가 이겼다.
#4
연왕에게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식객이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 배워오게 했다.
그러나 배우러 보낸 자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객이 죽었다. 왕은 크게 화를 내며 그를 벌했다. 왕은 객이 속인 것을 알지 못하고, 배우러 간 자가 늦었다고 벌을 준 것이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어놓고 죄 없는 신하만 벌준 것이다. 이야말로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는 우환이다. 또 사람에게 가장 급한 것으로 자기 목숨만 한 것이 없다. 한데 자기 몸도 죽지 않도록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왕을 장생하도록 하겠다는 것인가.
#5
송나라 사람이 연왕에게 대추나무 가시 끝에 원숭이를 조각하겠다고 청했다. 왕은 반드시 3개월간 재계한 후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연왕은 거둘 수 있는 양곡이 세 수레가 되는 고을에서 거둔 양곡을 모두 주었다.
그러다 왕실 직속 대장장이가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군주는 10일간 주연을 열지 않으면서 재계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오랜 시간 동안 재계할 수 없음을 알고 3개월의 기간을 정한 것입니다. 무릇 조각하는 칼은 그 깎는 것보다 반드시 작아야 합니다. 지금 저는 대장장이지만 그렇게 작은 것을 깎는 칼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은 실제 존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살피십시오.”
왕은 이 말을 듣고 물어보니 과연 속인 것이었다.
대장장이는 또 왕에게 말했다.
“도량 없이는 계측할 수 없는 것인데 말로 먹고사는 선비들은 이렇게 가시 끝에 조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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