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얼마 전에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한국은행 보고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지지하는 사람도 많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서 상징적이라고 느껴졌어요. 이민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각이 이렇게 복합적이구나 싶었습니다.
최저임금이라는 게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일하고 이 정도는 받아야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결정이잖아요. 외국인 노동자도 여기 살면서 일하는 거니까, 최저 임금이 더 낮아질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죠. 만일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면, 지금 한국의 최저임금이 너무 높은 거겠죠. 근데 최저임금 차등화에 찬성하는 분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분들 입장을 정당화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정도만 지급해도 일할 사람들이 있다면 괜찮은 것 아니냐. 근데 그건 국내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거든요. 물론 특정 경제학적 논리에서 애초에 최저임금을 법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어요. 즉, 시장 논리에 따라 임금을 너무 낮게 주면 일할 사람이 없을 거고, 일할 사람이 생길 때까지 임금을 높이면 된다고 일관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최저임금 제도는 찬성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좀 덜 줘도 된다는 생각은 논리의 내부 정합성이 떨어진다고 봐야죠.
Q. 이민자를 같이 살아갈 사람이라기보다는 값싼 노동력으로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 같은데요. 국제적으로도 어떻게 비칠지, 외국인들이 한국을 선택할지 우려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민을 (저출생 등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려는 발상은 빨리 극복할수록 좋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당연히 외국에서 젊고 유능한 분들이 많이 와서 아이도 낳고 하면 인구 문제도 해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와서 아이를 낳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야지 아이를 낳을 거잖아요. 근데 지금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애를 안 낳는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그냥 한 세대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해결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거겠죠. 외국인들도 여기 와서는 '언제 집 사서 아이 학원 보내서 좋은 대학 보내나' 이런 고민을 같이 할 거면 당연히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겠죠.
Q. 인구학자가 아닌 정치철학 연구자로서 저출생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세요?
정치철학 연구에서 장 자크 루소 같은 분들이 예전부터 지적해 온 관점이 있어요. 어떤 사회의 위계가 굉장히 가파르게 형성돼 있고, 윗자리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고 가정해 보죠. 그 경쟁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나는 좀 잘했어' 또는 '오늘 좀 못했어' 그냥 이러고 가볍게 넘기는 게 아니라, 내 자존감에 너무 크게 영향을 주는 그런 사회를 루소는 '병든 사회'라고 했거든요. 제가 학부생 대상 정치 철학 수업에서 루소를 가르치는데, 그 부분을 가르칠 때마다 '이거 한국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한국은 대학 입시를 기점으로 해서 그런 위계를 만들고, 계속해서 또 다른 위계를 추가하죠. 그래서 요즘은 어느 대학을 들어갔느냐, 그다음에는 문과 학생들의 경우 어느 로스쿨을 갔느냐, 그다음에는 어느 직장에 가서 얼마를 버느냐, 뭐 그런 식으로 끝없는 위계가 생기고 거기에서 평생을 고군분투를 합니다. 그 고군분투의 결과가 나의 자존감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사회이고 내 한 몸도 어느 정도 준수한 결과를 얻는 게 힘든데, 애를 낳으면 걔도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이 된다면 '빨리 애를 낳아야지' 이런 생각은 잘 안들 것 같아요.
그나마 좀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이런 경쟁 사이클에 맞춰서 자녀계획을 세우거든요. 부부가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될 때 아이를 낳아서, 어떤 동네에 살고, 어떤 교육을 제공하고 이런 식으로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건 이렇게 사이클 계산을 해보니까 견적이 안 나온다는 거잖아요.
Q. 때가 되면 대치동, 목동으로 이사하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죠.
근데 이걸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까지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인가? 루소나 존 롤스 같은 철학자들도 이런 고민을 했는데, 이 경쟁이 가끔은 굉장히 인위적인 희소성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대학 서열도 조금은 그런 면이 있잖아요. 물론 이 대학 가면 조금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인식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지만, 한국처럼 정말 대학 하나하나, 그 안에서도 학과 하나하나가 딱 서열이 정해진 것 같은 곳은 찾기 힘들어요.
이런 서열이 실재하는 어떤 차이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위계가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즉 합당한 희소성, 합당한 서열화인가, 아니면 인위적이고 불합리한 그 무엇인가가 고민되는 그런 위계와 서열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있는 것 같아요. 그걸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Q. 입시 제도가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조지프 피시킨이라는 정치철학자는 『병목 사회』라는 책에서 내가 통과해야만 원하는 다른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의 지점을 '병목'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피시킨은 많은 사회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나머지 인생의 전망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학 입시가 하나의 병목이라고도 언급합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면이 없지 않죠. 저출생·고령화로 인구가 줄고 대학이 남아돌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루소는 사람들이 때로는 없는 위계를 만들어내는 게, 그 위계를 원해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나는 남들보다 낫다'라는 걸 남들이 인정해 줘야지 내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일종의 병든 형태의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거든요.
Q.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심리적인 측면과 사회경제적인 측면이 악순환을 거듭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격심하고, 특정 병목을 통과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불리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구조라면, 심리적으로도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강해진다는 거죠. 경제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여러 폐해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벽한 해법은 없겠지만, 내가 공부를 얼마나 잘 하든 상관없이 이 사회 시민으로서는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교육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Q. 사람들이 인위적인 서열, 희소성을 만들어낸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아이들이 줄면 대학 가기는 쉬워지고 입시 스트레스도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저출생과 무관하게 그런 서열화는 계속 존재할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죠. 만약 사람들이 자기애를 확인하는 방식이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인정받느냐에 달린 거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온갖 서열들을 만들어내겠죠. 몇 년 전에 출간된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가 쓴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인공지능과 관련한 공상과학 소설인데 아주 소수의 몇 개 대학만 남고 아이들은 별로 없는 가까운 미래 사회가 배경입니다. 아이들은 목숨을 건 유전자 편집, 즉 '향상'을 하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는 걸로 그려져요. 그렇게 인위적인 희소성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서 명품 가방도 인터넷에서 보면 그 안에서도 등급을 나누잖아요. 루소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희소성, 위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러운 종착점이 없어요. 언제나 그 위로 위계를 끝없이 세울 수 있어서 문제가 더 심해집니다.
Q. 이민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네요. 근데 이민자들이 오면 그 위계 속에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저임금 차등화 문제도 그런 문제 아닌가 싶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최저임금 제도에 찬성하면서도 최저임금 차등 입장을 정당하게 견지하기는 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그런 입장에 계속 끌리고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나도 모르던 어떤 위계상의 전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꼭 같은 처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그런 위계가 내 안에 있던 게 아닌가 한 번 고민을 해봐야 하지 싶습니다.
또 한 가지 점검해 볼 사안은 '인종 정의'(racial justice)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문제의식이 없는 부분인데, 이게 꼭 인종이 아니더라도 예컨대 아시아 내에서도 어느 지역이냐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는 경향도 포함합니다. 그간에는 이런 성향을 갖고 있어도 노출될 일이 없는 사회였다면 앞으로는 여기에 대한 감수성을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그런 계기가 생기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송 교수는 이민 문제에 대해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우리나라 개발자들 중에 한국은 스트레스가 너무 많다며 '텍사스 가서 살래'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텍사스 가면 개발자들이 돈도 많이 번다고 하고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인도 개발자들이 텍사스 가지 서울에 오려고 할까요?"
그러면서 우리 고학력 고숙련 노동자들도 외국 나가겠다는 상황에서, 해외 고숙련 노동자들을 어디서 얼마나 데리고 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송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고학력이든 저학력이든 한국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지 정책 입안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이민자들도 좀 더 용이하게 모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뀌지 않으면 저는 그 어떤 이민정책도 쓸모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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