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오래전부터 유도 종주국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일본 유도의 자존심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철저히 구겨졌습니다. 일본이 사랑했던 유도 간판스타 다무라 료코가 국제 대회에 처음 출전한 무명의 만 16살 소녀에게 충격패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애틀랜타 올림픽 최대 이변을 일으키며 북한 유도 사상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낸 그 소녀의 이름은 바로 계순희였습니다.
'와일드카드'로 올림픽에 나선 계순희
일본의 유도 천재이자 금메달 후보 0순위이었던 다무라 료코를 무너뜨린 계순희는 애초 올림픽에 나설 자격이 없었습니다. 국제 대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한이 국제 대회 출전을 안 하고 있었는데, 국제유도연맹은 1996년 초 북한에 이른바 '와일드카드' 출전권 1장을 부여했습니다.
북한은 고심 끝에 계순희를 대표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니까 계순희의 국제 대회 첫 무대가 바로 애틀랜타 올림픽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계순희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유도인들도 그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당시 TV 중계방송에서 계순희의 이름을 'KYE SUN'으로만 표기할 정도였습니다. 계순희는 그만큼 철저히 무명 선수였던 것입니다.
84연승 '천하무적' 다무라 료코
다무라 료코는 남녀 통틀어 최고 스타였습니다. 당시 일본 유도의 아이콘이었고, 일본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 스타를 능가하는 국민적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1975년생인 다무라는 최경량급인 여자 48kg급 선수이었는데 만 16세였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유도 신동이 나타났다며 큰 기대감을 보였고 이후 이 체급 세계 최강자로 우뚝 섰습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격년제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서 여자 48kg급을 무려 6회 연속 우승했고 자국에서 열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유도 천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결승에서 프랑스의 세실 노바크에게 패배한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계순희와의 결승 경기 전까지 4년 동안 무려 84연승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천하무적이었던 것입니다. 애틀랜타 올림픽 개회식 선수단 입장 때 다무라 료코가 일본 선수단의 기수를 맡을 만큼 전 종목을 통틀어 최고 인기 스타였습니다.
"도대체 계순희가 누구입니까?"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여자 48kg급 경기가 열린 날, 필자는 유도 경기장이었던 조지아 월드 콩그레스 센터(Georgia World Congress Center)에서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다무라의 금메달의 확률이 거의 100%이었기 때문에 경기장은 일본의 안방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일본 관중이 엄청나게 들어와 열띤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관중석이 온통 일장기의 물결이었던 것입니다. 일본 응원단의 기대대로 다무라는 가볍게 결승에 올랐습니다. 준결승까지 4경기 중 3경기가 한판승이었고 한 경기는 절반승으로 따낼 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북한의 계순희가 승승장구하며 결승에 올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계순희는 1979년생으로 당시 만 16세.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계순희는 특히 준결승에서 1994년부터 유럽선수권을 3회 연속 우승했던 스페인의 욜란다 솔레르를 시원하게 한판으로 꺾어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현장의 중계진과 취재진들은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계순희가 누구냐?" 일본 기자들이 한국 취재진에게 와서 물어볼 정도로 당시 완전 무명이었고, 전력 노출이 전혀 안 된 상태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선수의 결승 대진이 성사되자 '일본의 유도 천재와 북한의 16살 소녀의 대결', '만약 계순희가 다무라를 꺾는다면 대회 최대 이변일 것이다'라고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충격의 완패 vs '깜짝 영웅' 등극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예상을 뒤엎고 계순희가 다무라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계순희의 키가 158cm로 146cm인 다무라보다 12cm가 큰데 우세한 체격 조건과 힘을 앞세워 다무라의 기술을 무력화했습니다. 다무라가 안다리를 걸기 위해 양쪽 발로 계순희의 허점을 노렸지만 번번이 허사였습니다. 주특기인 업어치기도 계순희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잡기 싸움에서도 계순희가 다무라를 압도했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힘을 앞세운 계순희가 연이어 위협적인 공격을 가했습니다. 경기 종료 36초를 남기고 계순희가 전광석화 같은 발뒤축걸기로 '포인트'를 따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다무라의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판정까지 갈 경우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무라가 곧바로 빗당겨치기 공격을 시도해 오자 계순희는 되치기로 '효과'를 따냈습니다. 다무라를 매트 위로 내동댕이치며 경기 종료 30여 초 전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것입니다. 이 되치기 하는 장면을 보면 계순희의 힘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패배 위기에 몰린 다무라는 급하게 공격을 시도했지만 위협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종료 5초 전 위장공격으로 '지도' 벌칙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계순희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계순희와 북한 코치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환호한 반면, 다무라는 패배 충격에 한동안 매트에 무릎 꿇은 채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일본 코치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일본 응원단도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만 16세 계순희는 당시 유도 종목에서 최연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북한 유도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무엇보다 첫 출전한 국제 대회인 올림픽에서 곧바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믿기 힘든 업적을 세웠습니다.
승리 직후 계순희의 인터뷰는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그는 국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84연승 행진을 구가하던 다무라를 겨냥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는 이렇게 말하며 이른바 '계순희 어록'을 만들어냈습니다.
"다무라의 실력이 듣던 것보다는 못했다. 그의 경기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보지 못해 걱정했는데 오늘 경기를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웠다. 북한 국내 대회보다 올림픽 우승이 쉬운 것 같다. 북한에서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 경기하기 힘들지만 국제 대회에서는 잘 모르는 상대와 싸우니 오히려 부담이 없었다."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두 선수는 아쉽게도 더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계순희가 체급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1997년 체급을 52kg급으로 올린 계순희는 그해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결승에서 우리나라의 김혜숙 선수를 꺾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1999년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에 이어 2001년 세계선수권에서는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2003년 다시 체급을 57kg급으로 올려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올림픽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목에 걸었던 것입니다.
이후 2005년과 2007년 세계선수권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선수권 4연패를 달성했습니다.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16강에서 탈락한 뒤 2010년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선수 생활 때 공로를 인정받아 '인민체육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유도를 '유술'이라고 하는데 계순희의 애틀랜타 금메달 쾌거를 소재로 한 <소녀 유술 강자>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계순희에게 패배한 충격에 한동안 실의에 빠져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던 다무라 료코는 이후 화려하게 재기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