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두댓은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아얀 히르시 알리는 최근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꾸준히 비판해 왔으며, 계몽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를 오랫동안 신봉해 온 히르시 알리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은 뒤 종교를 바꿨다고 말한다.
먼저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유물론은 그가 보기에 오늘날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도전받으며 근거가 너무 취약했다. 또한, 서구 자유주의를 탄생시킨 (기독교) 성서의 전통이 그가 믿는 가치에 더 확고한 토대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둘째, 가혹한 종교에 맞서 무신론은 그에게 분명 일종의 해방감을 안겨줬지만, 장기적으로 “영적인 위안 없는 삶은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상대로 히르시 알리의 발표에 적잖은 비판이 쏟아졌다. 먼저 기독교인들 중에 그가 기독교의 교리가 필요하거나 유용하다고만 했지 진실된 교리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은 데 실망한 사람들이 이를 지적했다. 또 무신론자들 중에는 그가 신앙이 필요한 이유로 나열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을 무신론의 논리로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 섣불리 결론을 내린 데 당황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딱히 히르시 알리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우주와 이 세상 속 인간의 존재에 관해 아는 것들을 떠올려 보면, 인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를 상상하는
종교적인 태도에 이르게 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다만 그 존재를 찾아가는 경로와 과정은 각자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싹을 틔워 발전한 문명을 사랑해서, 또 기독교가 설파하는 논리에서 어떤 영적인 응답을 받았다고 느껴서 기독교를 믿고 기독교도로 살기로 마음먹은 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완벽한 신학적 확신을 얻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agnosticism)만 내세우며 결정을 미루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그런데 히르시 알리에게 제기된 비판을 읽다 보니, 그의 선택과 결정을 무신론자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르시 알리가 말하는 종교의 길은 훌륭한 세속적 무신론자들이 종교의 형성과 기원, 종교가 운영되는 방식에 관해 하는 설명과 여러모로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을 따르면, 개인이 종교를 찾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우주의 원리를 향한 열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히르시 알리는 이를 “영적인 위안(solace)을 향한 동경”이라고 표현했다.) 반대로 조직화된 종교의 부상은 통일된 도덕적 형이상학 구조,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야기, 복잡한 사회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기제에 대한 필요를 반영한다. (히르시 알리는 이를 “자신의 정치적 세계관을 뒷받침할 종교적 체계의 필요성”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아라 노렌자얀이 2015년에 쓴 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를 보면, 세계적인 종교들은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기술로 묘사된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갈 때보다 훨씬 큰 조직을 이뤄야 하는 도시에서 살게 된 인간에게 친사회적인 행동을 장려하는 수단이 필요했고, 종교가 바로 그 역할을 했다는 거다. 노렌자얀은 “(남들이) 보는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 언행을 삼간다”고 지적하며, 도덕적으로 옳은 신이 선한 행동을 궁극적으로 보증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사회와 정부의 원칙들은 종교의 보증 없이도 그 자체로 사람들이 믿고 따를 만한 규범으로 자리를 잡는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향한 믿음이 딱히 필요 없어지자, 사람들은 종교라는 사다리를 치웠는데, 이게 곧 많은 선진국에서 나타난 세속화의 흐름이다. 노렌자얀의 전제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외부의 적이 나타나 내부의 결속이 점점 더 와해되면, ‘거대한 신’이 다시 필요해지고, 사람들은 히르시 알리처럼 다시 종교에 기대 사회적 질서를 세우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가 된다.
다만 여기엔 개인이 종교를 찾는 이유에 관한 설명이 빠졌다. 즉 우주의 원리나 죽음을 향한 두려움이 사람을 종교적 신앙의 어떤 부분에 이르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이 없다. 많은 사람에게 이는 워낙 중요한 문제이다 보니, 히르시 알리가 이 부분을 쏙 뺐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실망한 독자들이 많았다.
(남들이) 보는 눈이 사회적으로 쓸모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한 사회를 이뤄 전반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 된다. 특정 교리나 기적에 관한 주장은 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내일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기독교가 지워진다면, 환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현대 서구의 사상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원리는 삼위일체와 무덤에서 천사들과 함께 부활한 메시아”라고 말해도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 거다.
초자연적인 믿음의 실체를 설명하고자 한 시도 중에 가장 강력했던 것은 파스칼 보이어, 폴 블룸과 같은 심리학자들의 설명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원래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발달시킨 인지적 특징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이나 불가능한 것의 존재를 믿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해가 없었다면 인간이 사회를 이뤄 사는 게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블룸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 이론은 “과도한 상상”을 낳는다.
“인간은 사물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서 인식한다. 그래서 영혼 없는 육체나 육체 없는 영혼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이나 사후 세계를 믿는 이유다.
우리는 또 인간의 존재나 인간의 체계에 어떤 의도가 있을지를 늘 찾는다. 그래서 원래는 있지도 않던 목표나 욕망을 억지로 추론해 내곤 한다.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정령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만들었을 거라 믿는) 창조론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보이어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상상해 낼 때 인지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범주 안에서 그 이야기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이야기는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적당히 혼재된 것이다. 예를 들어 유령은 육체가 없이 마음만 있는 존재다. 마음은 익숙하지만, 육체 없는 마음은 낯설다. 천사의 경우 사람은 익숙하지만, 날개가 달려 날 수 있는 사람은 낯설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이를 낳은 것도 마찬가지다. 임신은 익숙하지만, 성관계없는 임신은 낯설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사람은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사회는 질서가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본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해 낸다. 똑똑하고 합리적이며, 자유주의자인 아얀 히르시 알리 같은 사람이 놀랍게도 갑자기 2천 년 전에 섹스 없이 신의 섭리로 잉태한 유대인의 존재와 그가 설파한 교리를 받들게 된 것도 결국 이 모든 게 합쳐진 결과다.
다만 이 논리를 따라가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주장은 실제 종교적 경험의 본질에 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한다. 종교적 경험이란 심리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종교의 효용보다 훨씬 더 이상하고, 예상치 못한 것이며, 불안정한 경험이다. 여러 이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종교의 역사와 전통을 뛰어넘는 더 근원적인 힘이 이 경험에서 나온다.
이렇게 이상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람들의 경험이나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을 제공해 줄 전통이 없는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을 지켜보면 된다. 예를 들어 오순절 교파의 신앙 치유 예배나 로마 가톨릭 미사를 통해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면, 당신은 그 경험이 의미하는 바를 기독교 교리에 비춰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무런 설명의 틀을 찾을 수 없는 자연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이때 당신이 느낄 낯섦이 바로 종교적인 경험의 본질에 더 가깝다.
나는 이런 낯섦을 기독교 교리에 대한 구조적인 기대를 내려놓고 기독교 복음서를 읽음으로써 느낄 수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럼, 복음서는 예수와 관련해 일어난 일들의 일인칭 보고서가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또 이후 기독교를 이용하려 한 권력이 사회에 질서를 심고자 예수의 행적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 지금의 복음서 강독은 신비로운 경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