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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할리우드 작가 파업과 A.I. 시대의 노사 관계

심영구 기자

입력 : 2023.10.09 10:01|수정 : 2023.10.09 10:01

[뉴욕타임스 칼럼] Hollywood's Deal With Screenwriters Just Rewrote the Rules Around A.I., By Adam Seth Litwin


스프 NYT 뉴욕타임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아담 세스 리트윈 교수는 코넬대학교에서 산업과 노동의 관계를 연구한다.
 

미국작가조합(WGA, Writers Guild of America)이 이번 주 할리우드 제작사들과 잠정 합의한 내용을 보면, 영화 업계에만 적용될 법한 조항들이 많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작가들이 일하는 작업실의 넓이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해외 판권 계약 가운데 작가들의 몫을 늘리는 문제가 그렇다. 그러나 사실 자동차 노조부터 화이트칼라 중간 관리자를 포함한 사무직 노동자들까지 이번 작가조합의 파업이 어떻게 타결됐는지 그 합의안을 아주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번 파업과 쟁의 끝에 나온 합의안은 디지털 세계의 노사 관계에 기념비적인 선례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임금이나 고용 조건, 복리 후생 등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는 사측이 노동자와의 협상에 성실하게(in good faith) 임해야 한다고 노동법에 명시돼 있다. 그러나 기술에 관한 문제는 마치 사업 전략처럼 사측, 경영진이 알아서 결정할 수 있는 고유 권한으로 여겨진다. 즉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을 사업에 어떤 식으로 어떻게 도입하고 적용할지는 노동자와의 협상 대상이 아니라, 경영진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는 뜻이다. 노동조합이 이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사측이 협상에 임해준다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의제에서 이를 일방적으로 제외하더라도 노동자로선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렇지만 미국작가조합은 기어이 인공지능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렸고, 매우 인상적인 타협안을 이끌어냈다.

과거에는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경영진이 기술과 관련된 결정을 다 내려놓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술에 관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초기 단계 논의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은 철저히 배제됐다. 그런데 이런 기술 가운데는 도입됐을 때 고용주는 물론이고 노동자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나마 사측이 협상에 임해야 할 의무가 있는 부분은 기술이 임금이나 고용 조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때였다. 이런 관행 탓에 작가조합이 파업에 들어가고 협상이 시작됐을 때도 많은 사람은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실질적으로 규제하는 방안을 작가조합이 관철해 내는 건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들은 꿈같은 일을 현실에서 구현했다. 작가조합은 할리우드 제작사들과 벌인 협상에서 고용주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사용하고 도입할지를 협상의 핵심 주제로 삼을 수 있다는 굉장한 선례를 남겼다. 작가조합은 심지어 일터에서 인공지능을 언제, 어떻게 써야 할지와 관련해 노동자들도 사측에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내야 한다는 선례까지 세웠다.

작가조합이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 기반 도구를 전면 금지하는 조항을 넣자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 놀라시는 분도 있을 거다. 대신 작가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장받고자 했다. 바로 인공지능이 작가의 생산성이나 대본 등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를 활용하되, 그 작품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가운데 작가들이 인간의 노동으로 기여한 부분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다. 미국작가조합이 쟁취한 가장 큰 결과물이 바로 이 점을 보장받은 거다.

과연 어떻게 해낸 걸까? 우선 이번 협상에서 양측은 "인공지능은 작가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즉, 제작사들은 작가조합에 소속된 작가들을 대신해 인공지능을 고용해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제작사들이 작품 초고를 쓰는 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경우 각본의 저자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활용한 초고를 다듬고 최종본을 탈고한 작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작가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고 백지상태에서 작품을 썼을 때처럼 약정된 임금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건 작가들이 알아서 선택할 일이다. 물론 제작사가 이를 허용한다고 계약에 명시한 경우에 한해서다. 반대로 제작사가 계약서에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각본을 써야 한다고 명시하는 건 금지됐다.

이번 협상이 타결된 데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제작사들도 인공지능에 어느 정도 우려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저작권을 명확하게 설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작사들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데 문제가 될 수 있다. 보통 제작사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작가들이 쓴 대본을 토대로 만든 작품에 대한 배타적인 저작권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돈을 번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더라도 반드시 사람(작가)이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건 제작사 스스로 저작권을 침해당할 우려를 해소하는 조치다.

과거에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무조건 저항하거나 기술 변화를 가로막으려던 노동자들의 시도는 늘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1986년 루퍼트 머독이 단칼에 해고해 버렸던 뉴스인터내셔널의 주조 활자 조판사, 식자공 등 노동자 6천여 명에게 물어보라. 당시 머독은 비밀리에 런던의 오래된 언론사 거리 플릿 스트리트에 있던 인쇄소를 닫고, 도크랜드에 마련한 최첨단 기계를 활용한 인쇄소로 신문 생산 공정을 이전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6천여 명이 해고됐는데, 당시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계, 기술을 이용한 재교육과 점진적인 업무 전환, 재배치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새로운 기술을 거부하는 파업에 모든 걸 걸었고, 결과적으로 패배해 모든 걸 잃었다. 머독은 결국, 신문 발행과 배달에 단 하루도 차질을 빚지 않으면서 인쇄 공정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냄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미국작가조합은 좀 더 성공적인 노동자들의 쟁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1960년에 있었던 국제항만창고노조의 파업이 그렇다. 당시 해리 브릿지스 노조위원장은 변화에 거부감을 보이던 일선 노동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즉, 항만의 물류가 컨테이너화와 컨테이너 관리 기술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 과정에서 항만 물류 부문의 일자리 자체가 많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추세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브릿지스 위원장은 컨테이너화 자체에 반대하는 싸움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어느 정도 보장하고, 해고되는 노동자에게는 퇴직금이나 해고 수당을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전략을 짜서 협상에 임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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