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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디지털 유산은 어떻게 상속해야 하나

이성훈 기자

입력 : 2023.05.01 09:07|수정 : 2023.05.01 09:07

'기억'과 '망각' 사이 저울질…新 디지털 유산법 발의


생전 SNS 사진·영상도 상속 '디지털 유산법' 발의
"천안함 마흔여섯 용사 중에서 34명의 유족이 싸이월드에 고인의 디지털 유산 상속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9명은 자료를 비공개로 해놓아서 결국 사진 한 장 받지 못했어요."

"상심이 크셨던 분들이 많습니다. 갑자기 자식이나 남편, 아버지를 잃은 유가족 입장에서는 굉장히 절실했던 거죠."

- 이환근 천안함재단 사무총장

지난해 미니홈피로 유명한 싸이월드가 '디지털 상속권 보호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고인이 된 회원의 사진이나 동영상, 게시글 등을 유족에게 이관하는 서비스입니다. 지난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뒤 싸이월드 측에 디지털 유산 상속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유족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천안함 마흔여섯 용사 가운데 계정이 없는 용사 등을 제외하고 34명의 유족이 디지털 유산 상속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9명의 유족은 사진 한 장 받지 못했습니다. 싸이월드의 전향적인 서비스 개시에도 왜 일부 유족은 고인의 디지털 흔적을 상속받지 못한 걸까요.

무슨 상황인데? - 한국엔 없는 '디지털 유산법'

디지털 유산법 발의
우리나라에는 고인이 생성해 인터넷에 기록·보관하고 있던 정보, 즉 디지털 유산에 대한 권리 행사를 누가 어떻게 할지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고인이 남긴 물건이나 재산권 등은 민법에 따라 배우자나 부모, 자녀 등에게 상속이 되고, 상속인은 해당 유산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유산은 민법상 물건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싸이월드도 ①고인이 된 회원의 유족 등 상속인이 ②이용자의 사망 사실과 상속 관계를 증명할 경우 ③공개 설정된 자료에 한해서 저작권을 넘겨주고 있습니다. 함부로 고인의 자료를 건넸다가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천안함 용사 9명은 생전에 자신의 게시물을 전부 일촌 공개나 비공개로 설정해 뒀습니다. 공개 설정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싸이월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유산을 건네받은 25명의 유족도 공개 설정 사진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 다른 업체들은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고인의 정보 제공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네이버의 디지털 유산 관련 정책을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네이버의 디지털 유산 정책>

네이버는 회원의 아이디 및 비밀번호와 같은 계정정보를 일신전속적 정보로 보아 유족의 요청이 있는 경우라도 이를 유족에게 제공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계정정보에 해당하는 비밀번호는 복호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암호화되기 때문에 네이버조차도 이를 알 수 없는 점까지 고려하였습니다.

다만, 유족 등 정당한 권리를 갖는 분이 요청하시는 경우 고인과의 관계를 확인한 후에 요청에 따라 회원 탈퇴 처리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공개 블로그 등 계정에 로그인하지 않고서도 일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개된 자료'에 대해서는 유가족의 편의 제공을 위해 유가족에게 가족 증명서류, 동의서 등의 확인 절차를 거친 후 백업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용자가 숨지면 가족조차도 고인의 디지털 유산에 접근할 방법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새로운 상황 - 생전에 상속자 지정하는 '디지털 유산법' 발의


디지털 유산 상속의 길을 열어줄 법안이 4월 25일 국회에 발의됐습니다. 이른바 '디지털 유산법'인데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방송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허은아 의원이 디지털 유산의 승계 여부와 범위를 이용자와 서비스 제공자가 사전에 결정할 수 있는 근거를 담은 '정보통신망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디지털 유산법은 고인이 미리 정한 방식에 따라 유족 등에 상속하거나 삭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개정안은 이용자가 사망할 경우 서비스 제공자는 해당 계정을 휴면으로 설정하고, 이용자가 생전에 정한 방식으로 유산을 처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약관으로 이용자가 디지털 유산 상속 여부를 비롯해 상속한다면 누구에게 할지 등을 정하는 겁니다. 기업은 자신들의 서비스 특성에 맞게 별도 보존 기한 등을 설정해 이용자의 동의를 얻도록 했습니다. 또 디지털 유산 상속자가 고인 명의로 새 정보를 작성하거나 유통하지 못하도록 해 악용 가능성을 없앴습니다.

허 의원은 SBS와의 인터뷰에서 "이용자가 데이터 보존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고, 기업에도 자율권을 부여해 디지털 유산 상속이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번 법안을 계기로 개인의 디지털 주권이 한층 강화되는 동시에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소모적 논란이 종결되길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 상속받을 권리 vs 잊혀질 권리


우리나라는 국민 10명 가운데 9명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IT 강국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아직까지 디지털 유산 상속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는데요. 사실 그동안 법제화 시도는 꾸준히 이뤄져 왔습니다.

국내에서는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지난 2010년부터 디지털 유산 상속 제도화가 추진됐습니다. 2010년 한나라당 유기준, 박대해, 김금래 의원이 각각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요. 2013년에는 새누리당 김장실, 손인춘 의원이, 지난해에도 국민의힘 황보승희 의원이 비슷한 법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하고 폐기되기 일쑤였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인터넷은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 J.D. 라시카

다른 쟁점 법안들에 밀린 이유도 있겠지만, 고인의 '잊혀질 권리' 침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 컸습니다.

미국의 소셜미디어 전문가인 J.D 라시카는 1998년 잡지 '살롱'에 '인터넷은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The Net never forget)'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 디지털 피부에 문신처럼 아로새겨지고 있다"고도 말했는데요. 라시카의 말처럼 우리의 과거는 온라인 공간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런 흔적을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새로 생겨났을 정도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족 입장에서는 사진 한 장, 글 한 줄이라도 건네받고 싶은 게 당연한 심정일 겁니다. 그러나 유족의 '상속받을 권리'만큼 고인의 '잊혀질 권리'도 중요합니다. 고인이 남긴 정보에는 민감한 정보들이 담겨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정보가 공개될 경우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이용자가 직접 디지털 유산 승계 여부와 범위, 승계자를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권리 충돌 문제를 피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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