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웹툰에서 창극까지
Q. 여성국극이 한 때 왜 그렇게 높은 인기를 누렸을까.
A.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1950년대였다. 특히 남성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몽룡과 성춘향은 10대인데 판소리에서는 나이 많은 명창들이 이몽룡을 연기하니까 시각적으로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여성국극은 달랐다. 20대, 30대 여성이 남성 분장을 했기 때문에 ‘꽃미남’ 같은 느낌으로 이몽룡을 연기했고, 관객들이 열광했다.
Q. 배우와 팬의 가상 결혼식도 열렸다고 들었다.
A. 맞다. 그 정도로 주역 남성 역할을 했던 여배우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활동했던 분들을 인터뷰하며 들었는데, 사진관에 가면 여성국극 배우들의 분장을 할 수 있는 소품들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가 ‘인생 네 컷’ 이런 곳에 사진 찍으러 가면 소품이 쫙 있는 것처럼, 당시 여성국극 배우들의 소품을 몸에 걸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여성잡지나 대중매체에서 여성국극 배우들을 엄청나게 조명했고, 그런 사료들이 다 남아있다.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님이 당시 연극 의상을 몇 번 한 경험이 있는데, 다른 극단을 가면 좋은 옷을 만들어 입히고 싶어도 너무 가난해서 그러지 못했는데 여성국극단에 가면 창고에 비단이 넘쳐나더라, 이런 증언을 한 적도 있다. 요즘의 케이팝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렸던 거다.
Q. 레퍼토리가 다양했다던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외국작품도 번안해서 하고.
A. 그런 점도 인기에 한몫했다. 당시 한국은 근대국가로서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전통문화의 고답적인 레퍼토리를 지겹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근데 여성국극은 당시 유행하던 신파 소설, 외국 소설, 심지어 ‘투란도트’ 같은 오페라까지 가져와서 만들었다. 요즘은 ‘정년이’ 웹툰이 나오고 창극도 만들고 드라마도 만드는 ‘미디어믹스’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당시엔 여성국극이 거의 유일하게 그런 사례 아니었을까.
Q. 그럼 배우들은 대부분 전통 소리를 배운 사람들이었나.
A. 초창기에는 그랬다. 해방 이후 굉장히 많은 권번(기생조합) 출신 여성들이 사회로 나오는데, 이들은 예술적인 기능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성 명창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들이 기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자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협회를 만들었다. 이게 여성국악동호회다. 여기서 공연을 열었는데 여성만 출연한 공연이 인기를 끄니까 이걸로 계속 한 번 해보자 했던 게 여성국극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초기에는 명창들의 성음을 위주로 공연했기 때문에 극적인 구성보다는 한 명씩 나와서 노래하고 들어가는 방식이었다면, 점점 뮤지컬과 비슷한 짜임새와 형식을 갖게 되면서 연극적인 소리로 옮겨갔다. 명창이 아니더라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극단에 들어가서 훈련받고, 창이 안되면 시조 성음을 배워서 무대에 섰다. 노래는 배우지 않고 연기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국극이 판소리 명창 중심의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서 더 많은 여성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그래도 남주인공 역할은 무조건 소리를 잘해야 했다. 외모나 키도 중요했고. 남주인공 역할을 맡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남자 역할을 하고 싶어서 극단에 들어갔는데 ‘너무 예뻐서’ 계속 여자 역할만 맡다가 화가 나서 직접 나가서 극단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박미숙과 그 일행’이라는 극단을 이끌었던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다.
Q. 남주인공을 맡으려면 분장도 연기도 목소리도 달라야 했을 텐데.
A.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목소리를 일부러 굵게 만들려고 연습했다고 한다. 판소리는 안 그래도 오래 훈련하면 탁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품이 발달되기 전이라 무거운 물건을 들기 위해 근력을 길러야 했는데, 진짜 칼싸움 훈련을 많이 했다. 심지어 ‘임신 8개월에 남자 분장하고 무대에서 칼싸움하는데, 아무도 내가 임신 중인 것을 몰랐다’고 증언하신 분도 있었다. 남자 역할을 하기 위해 목소리를 바꾸고 체격을 키우고 근력을 기르는 게 연습으로 되더라는 거다.
남자 코미디언들이 여장하고 여성인 척 연기하는 사례들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종종 보지 않나. 상대 성별을 어떤 식으로든 수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남성이 여성을 연기할 수 있는 것처럼 여성도 남성을 연기할 수 있고, 여성이라도 ‘더 여성’으로 보이고 싶을 때는 연기를 해야 한다. 머리 길러서 고데도 하고 ‘뽕브라’도 하고. 그러니까 여성이 더 여성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뽕브라’를 하는 것처럼, 무대 위에선 ‘어깨뽕’을 넣고 남성을 연기한 것이다.
Q. 인기 높았던 여성국극이 급격히 쇠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A.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이 한국의 전통문화유산들을 국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국극은 탈락하고 남녀 혼성 창극을 하는 현재의 국립창극단이 생겨났다. 당시 정권은 한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고 서구 열강들과 비교해도 처지지 않는 ‘힘 있는 전통’을 만들고 싶어 했는데 여성들만 무대에 서는 장르가 자신들을 대표하길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여성국극의 쇠락 요인으로는 당시 영화나 TV 방송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는 점을 가장 많이 든다. 또 후학 양성을 못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여성국극 하던 선생님들은 당시 너무 인기가 있어서 계속 무대에 서기만 하다가 앞날을 준비 못했다고 후회하더라.
사실 여성국극 업계에는 여성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사회적인 풍토에서 여성들은 무대에만 서고, 단장을 여성이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단 운영과 기획, 제작을 대부분 남성들이 맡았다. 그런데 여성국극 인기가 조금씩 떨어지는 와중에 방송이 인기를 얻고 정부에서 국립단체를 세우려고 하자 일제히 그쪽으로 옮겨갔다. 국립창극단 초대 단장이었던 김연수 선생도 여성국극 초기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인데 6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국립창극단을 만든다고 하자 바로 여성국극계를 떠나버렸다.
이렇게 내리막길을 걷다가 1970년대가 되면서 많은 비평가와 창극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여성국극을 폄훼하기 시작한다. ‘여성국극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의 저속한 취향일 뿐이었다, 못 배운 여자들이 코스튬 플레이를 한 거다’ 이런 식으로 평단이나 공연 흥행사들까지 여성국극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여성국극 스타였던 임춘앵 선생이 1975년에 별세했는데, 이때부턴 여성국극이 거의 빛을 잃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Q. 여성국극이 창극과 비슷한데, 왜 여성국극 배우들은 창극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A. 국립창극단은 완전히 전통 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건데, 여성국극단은 전통 소리가 기반이면서도 흥행을 중시하면서 연극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래서 여성국극 배우들 중에 국립창극단으로 간 경우는 별로 없고 TV나 영화, 대중음악계로 진출한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김을동 전 국회의원이다. 김을동 씨가 여성국극 2세대 배우였는데 방송으로 진출한 거다. 여성국극 쪽에선 그다지 빛을 못 봤지만 TV에서 굉장히 성공했고, 정치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김을동 의원실에서 여성국극 관련 콘퍼런스도 개최하고 관심을 보였다.
Q. 여성국극은 지금은 거의 대가 끊긴 셈인데,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창극 ‘정년이’는 어떻게 봤나.
A. ‘정년이’가 드라마도 만들어진다는데, 창극으로 먼저 볼 수 있었던 게 너무 좋았다. 객석의 열기가 대단했고 20대 여성들이 창극을 이렇게 향유할 수 있다는 점도 뭉클했다. 아직 극을 시작도 안 했는데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더라.
국립창극단 초대 단장이었던 김연수 명창이 여성국극을 버리고 국립창극단을 만들었는데, 훗날 이렇게 국립창극단이 여성국극을 갖고 창극을 만들어서 인기를 얻을 거라고 예측했을까? 정말 역사는 흥미롭다.
‘정년이’ 웹툰은 많은 조사와 연구를 거쳐 나왔지만, 어떤 사료나 참고 문헌들을 소재로 이런 스토리가 만들어졌는지 함께 알려지지 않은 건 아쉽다. 웹툰을 봤던 젊은 관객들이 ‘우리들의 예쁜 2D 캐릭터가 3D가 됐다’는 점 외에, 실제 상황을 알고 이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함께 즐겼다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Q. 카리스마 있는 남장 여자 ‘고사장’ 같은 캐릭터도 다 그런 조사를 통해 나온 것인가.
A. 그렇게 본다. 웹툰 작가들이 사료 조사도 많이 했고, 제가 하는 강연도 여러 번 와서 들었다. 고사장은 그 시대 너무나 남성이 되고 싶었고 자기를 남성으로 만들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여성국극 했던 선생님들은 그렇게 남성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을 계속 여성으로 대하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느꼈다 하시더라. 그래서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게 이 사회가 줄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호칭을 부여했고 그게 사장, 회장이었다.
백도앵이라는 캐릭터도 나오는데, 끝까지 노래를 못 부른다. 너무 양반집 출신이라 ‘노래는 기생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성국극 극단에서 굉장히 갈등하는 캐릭터다. 실제로 내가 인터뷰했던 이소자 선생님이 그런 케이스였다. 이중의 구속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건데, 본인은 여성이고 무대에서는 완전히 남성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존재로 서 있지만, 그 와중에도 노래를 부르면 기생 출신이라고 할까 봐 너무 두려운 거다. 그래서 이 선생님을 무대에 세워서 ‘노래는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Q. ‘정년이’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중요하게 다뤄진 것도 눈에 띄었다.
A. 많은 여성서사에서 택하는 방식인데, ‘정년이’에선 좀 더 특별했던 것 같다. 정년이도 그렇고, 정년이와 경쟁 구도에 있는 영서도 그렇고, 어머니를 설명해야만 지금 이 캐릭터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정년이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추월만정’이라는 노래가 정말 중요하다.
정년이 어머니 역할을 맡은 김금미 선생님은 원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여성국극 부활 움직임이 있을 때 젊은 배우로 여성국극에 몇 번 출연한 적이 있다. 김금미 선생님 어머니도 여성국극 배우였다. 김금미 선생님이 나오는 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딸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어머니 역할을 한다.
Q. 젊은 관객들이 왜 창극 정년이에 열광했을까.
A. 원작인 웹툰 ‘정년이’의 인기가 그만큼 컸다. 웹툰의 인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인 것 같다. 1950년대 여성국극의 팬들도 젊은 여학생들이었다. 그때도 비슷했다고 느끼는데, 규범적인 형식을 벗어나서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내는 방식의 미디어에 여성 관객들이 굉장히 감이 좋은 것 같다. 젊은 여성 관객들은 전통적인 규칙을 벗어나는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고, 자신들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들만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던 공연이, 지금도 아니고 1950년대 있었다는 게 오늘을 사는 젊은 여성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다. 심지어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이룬 사례인데, 사실 지금도 그러기는 힘드니까 일종의 판타지를 제공해 주는 점도 있다.
Q. 여성국극 현재의 상황은 어떤가.
A. 2000년대 초반까지는 지원기금을 받아서 좋은 공연도 많이 했는데, 점점 힘이 빠졌다. 왜냐하면 여성국극 하던 선생님들이 점점 늙으셨으니까. 여성국극 1세대 선생님들 연세가 이제 거의 90이다. 후학을 양성하긴 했지만 별로 많지는 않고, 이 친구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다른 일을 했고.
지금은 방자 역할로 유명했던 조영숙 선생님 제자들이 소규모로 시도하고 있는 정도다. 보존회라는 게 있었는데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서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 ‘정년이’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실제 여성국극 했던 선생님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제자도 가족도 없는 경우는 정말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조영숙 선생님은 이번에 다행히 창극 ‘정년이’를 보셨다. 많이 우셨다고 하더라.
Q. 여성국극을 예전 모습 그대로 다시 공연하는 건 어떨 것 같은가.
A. 글쎄, 한 번 정도 체험이나 고증 차원에서는 괜찮을 것 같지만, 예전과 같은 형식으로 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미디어믹스가 되는 게 의미가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웹툰 정년이, 창극 정년이처럼 계속 여성국극을 ‘언급’해 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어떤 예술 장르든 태어났으면 소멸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끝자락에서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어떤 장르들은 중요한 전통으로 살아남기도 하지만, 어떤 장르는 힘을 잃게 되는 데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여성국극은 생각보단 전통을 많이 고수한 장르는 아니었고 대중적 요소가 많이 섞였는데, 지금은 대중적인 장르가 너무 재미있는 게 많지 않나.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구미나 애호도가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
Q. 그래도 요즘 젊은 세대는 여성국극을 오히려 아주 신선한 장르로 여긴다. 장르의 콘셉트나, 그 장르의 함의는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A. 그래서 여성국극의 원전을 지킨다는 관점보다는, 여성국극에서 얻은 배움으로부터 뭔가 시작된다는 관점으로 작업한다. 여성국극은 현대미술이 가져야 할 도전적이고 진보적인 가치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배우들을 기용하고 돈을 많이 들여서 대형 공연을 만드는 일, 선생님들이 과거의 영화로웠던 순간들을 다시 한번 맛보게 하는 일, 이런 건 오히려 쉬울 것 같다. 그보다는 새로운 장르 안에서 계속 ‘언급’하는 방식의 작품이 나오면 우리가 이 전통을 더 미래적인 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Q. 어떤 작업을 하고 있고, 할 계획인가.
A. 성별의 ‘수행’이나 이 표현들이 굉장히 인위적이라는 게 내가 여성국극에서 발견했던 점이고, 그걸 계속 작업에 녹여내고 싶었다. 또 여성국극이 쉽게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성별 규범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배제되는 존재들을 무대에 끌어들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2016년 지금은 없어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변칙 판타지’는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 갈등하고 있는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 배우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이 합창단을 만나게 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는 레즈비언 배우, 장애인 배우 같은, ‘뭔가를 극복하기 위해’ 연기를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그들이 뭔가를 극복하기 위해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냥 직업 배우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여성국극 선생님들의 삶에 더 마음이 간다. 그분들의 삶에서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작업 안에서 슬프지 않고 의미 있는 것으로 계속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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