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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우리는 회의(懷疑)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원종진 기자

입력 : 2023.04.13 09:24|수정 : 2023.04.13 09:24

고개드는 전원위 무용론…'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제가 소속된 회사의 예능 프로그램 촬영이 있었습니다. 연예인들이 여러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컨셉의,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출연 연예인들은 PD에 의해 갑자기 불려나와 공개된 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게 됐는데, 다음은 그중의 한 대목입니다.
 
기자 : 만약 국회의원이 된다면 어떤 국회의원이 되고 싶나요?

개그맨 A) 하아…그, 그거 말하면 안 되잖아. 저는 식물국회를 굉장히 추천하는데요.

가수 B) 저희가 잠시 국회를 견학 아닌 견학을 하고 나서, A 씨가 바닥에서 주짓수를 하더라고요. 국회에서 이게 필요할 것 같다 그러면서, 자꾸 좀 그랬는데. 동물 국회가 아닌 식물 국회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선거제 개편안 논의 국회 전원위원회 개최 (자료화면)
삭막한 국회에서 샤방샤방한 연예인들을 보며 잠시나마 웃음 지을 수 있었지만, 마음 한편은 왠지 모르게 씁쓸했습니다. 국회에서의 상시적 싸움을 풍자한 '동물 국회'란 단어를 즉석에서 비틀어 '식물 국회를 만들겠다'고 말한 재치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출입 기자로서 밤낮으로 취재하는 대상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동물' 아니면 '식물'로 표상되는 국회에서 모처럼 의원들이 '사람답게' 전체 토론을 벌이자고 나섰습니다. 자신들을 뽑는 기준인 선거제도 개편을 두고 지난 10일부터 오늘(13일)까지 '전원위원회'를 열어 토론을 벌이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역시나 내외의 시선은 싸늘합니다. '전체 토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의석은 3분의 1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여야 지도부는 시큰둥하던 상황 속, 여당 대표가 갑자기 '의원 정수 축소'를 들고 나오며 의원들 사이엔 '여당이 판을 엎기로 작정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20년 만의 '의원 전체토론'에도 고개를 드는 회의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중에는 의정활동의 고민과 반성을 갖고 연단에 선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비판하고 꼬집는 것을 주된 업으로 삼는 기자이지만, 이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에 나선 정치인들의 모습을 전달해보고자 합니다. 정치 회의론은 이미 우리 사회의 주된 담론이 됐지만, 그 회의론을 한번쯤 회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회의(懷疑)의 감옥 속에서 살아야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수 축소·비례 폐지 주장, 국민 뜻 고찰 없다" 외친 국민의힘 의원

사실 전원위원회는 시작부터 김이 빠졌습니다. 지난 6일,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갑자기 '의원 정수 축소' 카드를 공개적으로 꺼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정치개혁특위 등에서 자당 의원들도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던 방안이었습니다. 소속 의원들의 잇단 설화와 지지율 하락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묘수'라는 반응도 나왔지만, 국민들의 정치 불신에 기대 선거제 개혁 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여당 대표 발언이 밑자락에 깔린 채 열린 전원위원회. 다수의 여당 의원들은 이를 받들어 '의원 정수 축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정수 축소의 한 방편으로 비례대표를 전면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국회의원들이 하는 게 뭐 있느냐'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에 비춰볼 때는 시원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발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중 정서 편승을 넘어,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 속, 자당 의원들 발언에 고민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소신 발언을 남긴 의원이 있었습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연단에 오른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이었습니다.

국회 전원위 토론 의원
▲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
 
많은 국민들께서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라고 말하고 있고 특권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에 일부 위원님께서도 비슷한 의견을 제안하시고 이를 위해 비례대표를 폐지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쉬운 것은 국민들께서 왜 이렇게 주장하시는지 그 이유와 고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과연 우리 정치가 국민들의 욕구와 기대치에 부합했는지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과 이를 개선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치 개혁과 선거 개혁을 논의해봤자 국민들 눈에는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 당신들의 천국을 벌인다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이 의원은 장애인을 대표하는 비례 의원으로 21대 국회에 등원했습니다. 한 번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한 이 의원이 다음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받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 그는 토론에서 '소수 약자와 다양한 교섭단체의 국회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전국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했는데, 구체적 대안 없는 비례대표 폐지론이 주를 이루던 전원위원회에서 장애인 비례대표 의원으로서의 소신이 느껴지는 발언이었습니다.
 

비록 말뿐일지라도…'반성'이야기 한 여야 의원들

미운 사람은 뭘 해도 미워 보이는 법. 또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여론도 많지만, 연단에 선 의원들이 정당을 불문하고 자기 반성을 쏟아낸 요 며칠 사이의 풍경은 분명 '동물 국회'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상당수 의원들은 자신이 소속된 당에 대한 비판도 감수해가며 '현행 제도로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국회 전원위 토론 의원
▲ 민주당 이탄희 의원
 
지금 국민의 삶이 어떻습니까? 15.9% 고금리에도 50만 원 대출을 줄 서서 받습니다. 전세대출 이자 월 60만 원 내던 사람이 200만 원 내고 있습니다. 주머니에 쓸 돈이 없습니다. 출생률은 세계 꼴찌고 기후 위기로 동물은 떼로 죽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멸종합니다. (…) 그런데 우리 정치는 이 큰 힘을 가지고도 국민 삶을 지키는 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반사이익 구조니까요. 대통령이 양곡관리법 거부하면서 문재인 정부 때는 왜 안 했냐 이러면 그만입니다. 노란봉투법, 진짜사장 교섭법 거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반사이익 구조니까요. 상대만 못 찍게 하면 선거 이기니까요. 제 소속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일 굴욕 외교 그 참담함을 반복해서 폭로하면 그만인 것이지 더 나아가서 새 시대의 외교 전략 그 대안을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정치가 없습니다.

국회 전원위 토론 의원
▲ 민주당 김영배 의원
 
존경하는 선배 동료 위원 여러분, 서울대를 졸업하고 고향 포항에서 30여 년간 일곱 번을 낙선하고 과메기를 공천해도 허대만은 이긴다 했던, 허대만 동지 기억하십니까? 그의 유지를 특히 우리 더불어 민주당은 어떻게 받들고 있습니까? 우리가 과연 개혁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한번 돌아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의힘 위원 여러분, 한번 돌아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청년들과 수많은 또 다른 허대만이 국민과 함께 정치를 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도 또다시 당리당략과 우리의 기득권 때문에 이 낡은 선거제도를 개혁하지 못한다면 국민들도 버리겠지만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거제 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야당 의원들과 함께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에 참여했던 여당 의원들의 고민이 묻어나는 발언들도 있었습니다.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 구성원으로 국회 정개특위 소위원장이었지만, 국회 전원위 추진 과정에서 자당 내 비판을 받기도 했던 조해진 의원 발언이 대표적입니다.

국회 전원위 토론 의원
▲ 국민의힘 조해진 의원
 
정치 개혁을 논의하면서 당혹감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를 얘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매일의 일상에서 기존의 퇴행적 행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말하는 국회와 구태를 반복하는 국회가 별개가 아닌데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도 참 힘듭니다. 자괴감과 함께 개혁의 전망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치 개혁의 방향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치적 차이를 이해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기본적으로 대화와 타협, 공존과 상생, 선의의 경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일상에서도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개혁을 논의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쟁을 계속하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진일보한 합의나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개혁을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 내일, 모레 이 일상에서부터 적대적 대립과 공격, 대결과 쟁투를 중단해야 합니다.
 

'제도 개혁'이 고담준론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랜드 센트럴 역을 오가는 군중들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당 조직의 본질에 대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군중은 전혀 조직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찰자가 지켜보게 되는 것은 혼란스런 무질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표와 개찰구가 그 많은 사람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에서 군중을 이루는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주어진 대안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당은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방식을 통해 이들을 조직한다. <절반의 인민주권>, E.E 샤츠슈나이더

'얼핏 보기에는 전혀 조직되지 않고,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대합실의 군중들이 저마다의 방향을 찾아가는 건 몇 개의 개찰구와 시간표 때문이다'.샤츠 슈나이더는 정치학의 고전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정당을 기반으로 한 민주정치가 기능하는 구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자의 목적지를 찾아 이리저리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역의 개찰구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돼 있는지는, 결국 그들 삶의 효율성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비유를 빌리자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는 재래식 기관차에 맞춰져 있던 서울역의 구조를 리모델링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기술은 발전하고 사회도 변화해 KTX는 물론 경의중앙선에 공항철도까지 들어오는 시대가 됐으니, 더 다양한 형태의 개찰구와 시간표가 들어설 역의 구조를 새로 짜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국회 기자실에 앉아 짬짬이 이런 글을 노트북에 적고 있는 와중에도 국회 안팎에서는 검찰 압수수색이 벌어지고 있고, 이런저런 험한 말들이 오늘도 오가고 있습니다. 제도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현실은 그렇습니다. 내일 또 어떤 말폭탄이 쏟아지고 '사람답게' 토론하자던 의원들이 '동물'로 돌변해 주짓수를 벌인다 해도, 시민들은 '또 저러네' 정도로 치부하며 주어진 하루를 살아갈 겁니다.

이처럼 '제도 개혁'을 내걸고 토론을 벌이는 의원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차가운 시선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제 개혁'이 고담준론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매번 근시안적 이익과 말초적 싸움에만 몰두한 의원들 스스로의 '태도'에 대한 성찰이 물과 공기처럼 이어져야합니다. 전원위원회 마지막 날, 또다시 '무용론'이 고개를 드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보려 하는 건, 그래도 국회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의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국회 전원위 토론 의원
▲ 민주당 장철민 의원
 
저는 사실 지금 정치 분열의 문제를 제도의 탓으로 돌리는 건 우리의 몰염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잘못하고 있죠. 선거구제가 잘못해서 우리가 분열의 정치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21대 국회 끝날 때까지 그 어떤 타협의 정치도 개선도 못 할 겁니다. 그러면 1년 동안 우리는 뭐 하는 건가? 저는 분명히 규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규범, 제도의 규범입니다. 우리 어떤 규범을 지킵니까? 우리 초등학생들한테도 남의 말 존중하라고 하는데 국회의원 치고 남의 말 존중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 제가 이쪽에 좀 국민의힘 위원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나 봅니다. 김웅 위원님께서 빵긋빵긋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계셔가지고 제가 많이 쳐다봤습니다. 그러시죠. 그렇게 하시죠. 정말로 앞으로 서로 그렇게 존중하면서 보겠습니다. 아니 정말로 김웅 위원님께서 너무 좋은 표정으로 봐주셔 가지고 많이 쳐다봤는데 정말로 그렇게 함께 서로 보면서 의회에, 합의에, 협의에, 그런 21대 국회도 변화의 모습들을 이 전원위원회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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