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

뉴스 > 경제

'빌라왕 배후'는 건축주로 돌아왔다

조윤하 기자

입력 : 2023.01.25 16:04|수정 : 2023.01.25 16:15

[빌라왕-국] ④ "법인 세워 또 전세사기"…늦어진 수사, 늘어나는 피해자


스프 전세사기
서울 화곡동에서 빌라 283채를 소유하고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전세사기를 벌인 '원조 화곡동 빌라왕 강 씨'. 강 씨 배후에는 공인중개사 조 씨가 있었습니다. 강 씨가 바지사장에 불과했단 내용은 빌라왕-국③편을 통해서 전해드렸죠. 그런데 보도 이후 제보가 한 건 왔습니다. 서울 화곡동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터지기 시작한 2019년에 자취를 감췄던 조 씨가 여전히 전세사기를 벌이고 있단 내용이었습니다. 사라졌던 조 씨가 다시 돌아온 곳, 역시 '화곡동'이었습니다.

2019년, 화곡동에서 자취를 감추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조 씨는 화곡동에서 자취를 감춘 건 지난 2019년 봄~여름쯤입니다. 1세대 전세사기 피해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이죠. 원조 화곡동 빌라왕 강 씨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에 고소하기 직전이기도 합니다. 조 씨는 이때 자신이 운영하던 희망부동산을 폐업합니다. 자신이 중개한 세입자들 집에 폐업을 알리는 쪽지도 붙입니다. '강 씨에게 임대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사고가 생겼다'면서 '자신도 당황스럽고 힘들어서 폐업 준비 중'이라고 말이죠.
 
<조 씨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남긴 쪽지>
임대인 강ㅇㅇ 씨에게 임대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사고가 생겨서 강ㅇㅇ씨의 대리인분께서 전세 보증금으로 거주 중인 빌라를 세입자들에게 매매하는 절차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중략) 저 또한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힘들어서 4월 중으로 폐업 준비 중에 있습니다. 폐업 전까지는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조 씨가 떠난 지 4년 정도 됐다면서, 앞으로도 화곡동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근 부동산]
"(떠난 지) 한 4, 5년 됐어요. 떠났어요. 그 뒤로 소식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이 지역에 못 돌아오죠. 강ㅇㅇ씨 사건이 있었잖아요."
 

2021년, 법인 세워서 화곡동으로 돌아오다


그런데 지난 2021년, 조 씨는 부동산 건축 법인 S사를 세웠습니다. 화곡동에 사무실도 차렸습니다. 조 씨가 세운 법인은 '건설업'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취재해 보니, 실제로 건축도 했습니다. 서울 화곡동에만 빌라 3채를 세웠습니다. 화곡동에서 전세사기를 주도한 뒤, 잠시 사라졌다가 버젓이 화곡동으로 돌아온 겁니다.

스프 전세사기 (사진=연합뉴스)
조 씨가 세운 신축 빌라는 대부분 분양가와 전세가가 똑같습니다. 이른바 '깡통전세' 건물입니다. '매매가=전세가'를 이용해서 무자본 갭투기로 1세대 전세사기를 주도했던 조 씨가 잠시 잠적했다가 다시 화곡동으로 돌아와서 빌라를 세웠고, 그 빌라가 '분양가=전세가'인 깡통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우연의 일치라곤 아무래도 보기 어렵겠죠.

S사가 세운 화곡동 내 신축 빌라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봤습니다. 한 빌라는 총 18채를 2명이 나눠 가졌습니다. 11채는 70대 남성 A씨, 6채는 30대 남성 B씨 소유입니다. (1채는 은행 소유) S사가 세운 다른 빌라 등기부등본에도 같은 이름이 나옵니다. 같은 회사가 세운 빌라를 같은 집주인들이 나눠 가졌을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요. 역시 높진 않을 겁니다.

스프 전세사기

조 씨에게 명의를 내준 70대 남성은 누굴까


취재진은 등기부등본상으로 최소 15채를 갖고 있는 A씨를 찾아갔습니다. A씨는 화곡동에서 멀리 떨어진 한 구축 빌라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지명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신축 빌라 15채를 갖고 있는 사람의 집이라고 보기엔 조금 허름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A씨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A씨 아내는 'A씨도 명의만 빌려준 바지 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해오던 사업이 기울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주위에 힘들다고 말하니, 누군가 '명의만 빌려주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A씨가 받은 돈은 1채에 50만 원입니다. A씨 아내는 지난해 재산세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70대인 A씨가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숨긴 겁니다. A씨와 함께 빌라를 나눠 가진 또 다른 집주인인 30대 B씨는 전국에 빌라만 403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A씨 같은 바지 사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A씨 아내]
"한 채에 50만 원씩 주면서 명의를 빌려준 거잖아요. 지금 수입도 없고, 돈이 너무 급하니까 (남편이) 꼬임에 넘어간 거 같은데. (계약을) 문서로 한 것도 아니고 구두로 한 거야. 나이 먹다 보니까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우리는 노령연금 받는 상황이에요."

화곡동으로 다시 돌아온 조 씨는 여전히 바지 사장을 앞세워서 전세사기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법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공인중개사, 이제는 건축주입니다. 바지 사장을 섭외하고 세입자들을 모아서 리베이트를 챙겼다면, 이제는 직접 빌라를 세워서 전세사기를 벌이고 있습니다.

스프 전세사기

'3년 5개월' 조 씨에게 면죄부 준 지지부진한 수사


조 씨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입니다. 원조 화곡동 빌라왕 강 씨와 조 씨에게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한 건 지난 2019년 8월입니다. 이미 조 씨는 부동산을 폐업하고 화곡동을 떠난 뒤죠.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1년 뒤인 2020년 8월,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이달 4일에서야 이들을 기소했습니다. 기소까지 2년 4개월이 걸린 겁니다. 피해자들이 고소한 지는 벌써 3년 5개월 만입니다.

3년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피해자들은 지쳐갔습니다. 강 씨와 조 씨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은 대화가 끊긴 지 오래입니다. 몇몇은 진척 없는 수사에, 변하지 않는 상황에 지쳐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검찰 수사가 늦어질수록 피해자들 고통은 더 짙어졌습니다.

수사는 지지부진했습니다. 피해자들 고소 이후 남부지검에서 대전지검 서산지청으로 이송됐다가, 다시 남부지검으로 돌아왔습니다. 담당 검사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피해자들이 답답한 마음에 수사 상황을 물으면 '선례가 없다', '법리 검토 중이다', '보완 수사 중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실제로 한 검사는 '기록을 넘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검토 중'이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도돌이표만 그렸던 겁니다.
전세사기 피해자 1
"아무리 물어봐도 '수사 중이다'. 수사관만 계속 바뀌고, 검사만 계속 바뀌고. '검사실 바뀌었습니다' 이런 문자만 계속 오고."

전세사기 피해자 2
"검사가 계속 바뀌면서 담당자만 바뀌는 문자만 받았고요. (검찰이) 처음 전화 왔을 때 '낙찰자가 있으니 저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수사는 지난해 12월, 겨우 한 달 동안만 집중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전세사기가 이곳저곳에서 터지면서 피해가 커졌던 시기입니다. 피해자들은 '이전엔 아무런 진척 없던 수사가 사건이 터지고, 모두가 주목하니 속도가 났다'고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피의자 조사도 12/7, 8, 13, 14, 15, 28에 진행됐습니다. 주로 12월에 몰린 겁니다. 심지어 피의자 강 씨에 대한 첫 소환조사도 이때였습니다.

"리베이트 받은 것이니 공인중개사법 위반 아니"라는 수사기관


그사이 조 씨의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는 처벌 시효가 지났습니다. 지난해 5월에 이미 시효가 도과했으니, 반년 넘게 지나버린 겁니다. 심지어 조 씨에 대한 구속영장도 기각됐습니다. '죄질이 무거우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검찰은 조 씨가 전세사기를 벌이면서 챙긴 돈이 공인중개사법상 '초과 보수'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리베이트'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현행 공인중개사법을 위반한 건 아니라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라면 조 씨처럼 전세사기를 초기 단계부터 기획하거나 개입한 공인중개사들은 모두 처벌이 어렵습니다. 공인중개사법을 위반했을 경우여야 중개사 자격이 정지되거나 새로운 부동산 개업이 제한됩니다. 공인중개사법을 위반하지 않으면 현업에서 그대로 활동해도 제재가 어렵습니다. '초과 보수'가 아닌 '리베이트'를 받아서 공인중개사법 위반은 아니라는 판단은 중개사들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인 거죠.

스프 전세사기
검찰은 '전략적으로 불기소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기+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면 '사기 혐의' 단건으로 기소할 때보다 형이 낮아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더 센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불기소했다는 검찰의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검찰 설명대로 법 하나로만 의율해서 센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조 씨는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보러가기 스프**'보러가기' 버튼이 눌리지 않으면 해당 주소를 주소창에 옮겨 붙여서 보실 수 있습니다.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