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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미래 반도체 패권 여기 달렸다"

노동규 기자

입력 : 2023.01.17 12:00|수정 : 2023.01.17 17:32

미 조지아주 SKC 앱솔릭스 '반도체 유리 기판' 공장 건설현장 르포


▲ 미 조지아주 커빙턴시 앱솔릭스 반도체 유리 기판 생산 공장 건설 현장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공항에서 I-20 고속도로에 올라 동남쪽으로 달리길 약 한 시간. 헤이즐브랜드 로드를 통해 커빙턴시로 빠져나가자 숲으로 둘러싸인 평온한 풍경이 나타난다. 차를 돌려 접어드는 도로 이름은 'SKC 드라이브'. 1999년 미 동남부에 진출해 현지 공장을 지은 한국 기업 SKC를 위해 조지아 주정부가 명명했다. SK 그룹의 첫 미국 공장이기도 한 이곳에서 지난해 SKC의 자회사 앱솔릭스가 반도체 유리 기판 생산 공장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전체 165만㎡ SKC 공장부지 안 약 12만㎡ 규모의 앱솔릭스 공장은 골조공사가 한창이었다. 올해 마지막 날까지 1단계 공장(SVM) 준공을 목표로 2억 4,000만 달러를 투자한다. 연산 1만 2,000㎡ 규모 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스마트 팩토리 기술로 170명까지 줄였다는 설명이다. 4억 1,000만 달러를 투입해 연산 7만 2,000㎡ 규모 2단계 공장(HVM)까지 완성할 경우 최소 400명 이상을 채용하기로 조지아 주정부와 약속했다.

앱솔릭스 현장 바로 옆에선 최근 매각된 필름 생산 공장이 여전히 SKC 간판을 달고 운영 중이다. 과거 폴리에스테르 필름 최대 시장 미국을 노려 커빙턴 공장을 지은 SKC는 2000년대 디스플레이·모바일용에 이르기까지 국내 필름산업을 선도해오다 지난해 회사 모체라 할 필름 사업부문을 사모펀드에 매각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신산업 분야에 집중한다는 이유였다. 앱솔릭스의 반도체 유리 기판 공장도 2024년 준공 뒤엔 임대료를 내고 사용한다.

SKC는 앱솔릭스 공장에서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패키징 3개 첨단 산업 생산 기술을 복합 운용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조지아 공대와 함께 개발한 반도체 유리 기판을 세계 최초로 상업화해 반도체 패키징 분야 판도를 바꾸겠다는 목표다. 반도체 회로 선폭을 줄이는 미세공정 기술 경쟁이 치열하지만 들어가는 연구개발 비용에 비해 성능 개선이 비약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요컨대 '패키징 혁신'을 통해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등에 필요한 고성능 컴퓨팅 시장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앱솔릭스가 개발한 반도체 유리 기판
패키징은 CPU와 GPU, 메모리 등 여러 개의 반도체와 MLCC(적층세라믹콘덴서·회로에 전류가 일정하게 흐르도록 제어) 등을 모아 하나의 부품으로 만드는 공정을 말한다. 플라스틱 기판 사용이 일반적이지만 10나노(㎚·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에서 5나노, 3나노 수준으로까지 미세화를 거듭하는 고성능 반도체의 패키징은 실리콘을 활용한 대만 TSMC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일반 반도체 패키징 시장이 연평균 7.9% 성장할 때 데이터센터 등 수요로 고성능반도체 패키징 시장은 13.4% 성장한다는 전망도 있다. 앱솔릭스는 유리 기판으로 이 시장을 뺏을 수 있다는 기대다.

앱솔릭스에 따르면 유리 기판은 실리콘 등 중간 기판이 필요 없어 두께가 얇고 전력 효율을 높인다. MLCC 같은 반도체 소자를 유리 기판 자체에 내재화하며 남긴 기존 면적엔 더 큰 CPU·GPU와 더 많은 메모리를 넣을 수 있다. 같은 면적으로 더 나은 성능을 구현한다는 얘기다. 서울 용산에 있는 KT 인터넷데이터센터에 유리 기판 반도체를 적용한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면적은 5분의 1로, 전력 사용량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게 앱솔릭스 측 설명이다. SKC는 앞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3 전시회에서 가로세로 각 50cm 면적에 0.8mm 두께를 가진 반도체 유리 기판 실물을 공개하기도 했다.

앱솔릭스 오준록 CEO
앱솔릭스 오준록 CEO는 "반도체 성능이 5년마다 10배씩 개선된다는 '무어의 법칙'이 2020년 이후 들어맞고 있지 않는 상황"이라며 "칩 제조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는 패키징 시장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가 반도체 선진국 지위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미래를 엿본 기분이지만 처음 시도니만큼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앱솔릭스 측도 "현재 건설 중인 1단계 공장만으로는 시장 수요를 못 따라갈 것으로 본다"면서도 구체적 매출 전망을 공개하진 않았다. 김성진 CTO총괄은 "양산 수율의 제고가 가장 중요하다"며 "한국에 있는 연구 인원들이 계속 작업을 하고 있고 그에 따라 최종 사업 규모가 정리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왜 조지아주인가?

1996년 SKC가 커빙턴 공장을 착공할 당시 조지아주는 200명 이상 고용을 조건으로 165만㎡ 부지를 단 돈 1달러에 공급했다. 한국 기업이 동남아나 중국도 아닌 미 동남부 조지아에 공장을 짓는 직접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재산세 면제와 직원 교육 등 각종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평균 인건비는 33위에 그치는 반면 조지아 공대와 에머리 대학 등에서 우수한 인력이 공급되는 점도 매력이다. 산불과 토네이도, 폭설 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점 역시 제조업하기엔 최적지로 꼽히는 이유다.

SKC 진출 이후 27년이 지난 지금 조지아는 이제 현대기아차와 두산, LG하우시스, 한화큐셀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한국 대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국 투자처 중 한 곳이 됐다. 조지아에 진출한 한국기업만 130곳이 넘는다. SKC가 첫 삽을 뜰 때만 해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커빙턴시 그린필드 지역엔 지금 월마트와 홈디포가 들어섰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기업도 앞다퉈 투자하는 곳이 됐지만 조지아주는 여전히 기업 유치에 대한 욕심을 놓지 않고 있다. 일자리와 경제가 기업 유치에 달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SKC가 동박 생산 공장을 북미 지역에 증설하려고 나서자 조지아주는 저렴한 전기세 등을 내세워 미국 내 4~5개 주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캐나다까지 아예 현금으로 3,000억 원을 제시하며 공장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SKC 측은 전했다.

◆ 한국 기업 미국행 러시…우리는?

SKC뿐 아니라 이미 많은 한국 기업이 최근 미국의 공급망 재편과 IRA 등 자국 우선 정책 극복을 위해 미국 설비투자를 이어가는 중이다. 텍사스주에 25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삼성전자, 애리조나주에 배터리공장 건립 계획을 밝힌 LG에너지솔루션은 물론 한국타이어도 최근 2조 1,000억 원 규모의 테네시주 공장 증설 계획을 발표했다. 한화는 지난주 조지아주에 3조 2,000억 원을 들여 대규모 태양광 생산 단지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유럽까지 지역 내 생산품 우대를 공언해 더 많은 설비투자의 해외 이전이 예상된다.

한국 주력 기업들의 미국행 러시는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생존전략이겠지만 분명 우리 경제에 좋은 일만은 아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불가피한 부분이 있지만 국내 투자가 위축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정부의 국내 투자 지원책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산업기반 유지를 위해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 같은 투자 촉진책과 함께 외국 기업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게 점점 절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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