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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푸틴에게 레드라인은 없다

심영구 기자

입력 : 2023.01.09 13:00|수정 : 2023.01.09 13:00

By 나이젤 굴드데이비스(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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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굴드데이비스(Nigel Gould-Davies)는 국제전략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의 러시아와 유라시아 선임 연구원이다.
 
“푸틴의 레드라인은 무엇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러시아가 불리한 전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멈추지 않자,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러시아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해 올바른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레드라인(red line)”이라는 말부터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는 ‘나쁜 은유’다. 러시아를 상대하는 전략은 몇 마디 은유보다 훨씬 더 엄정한 분석을 바탕으로 짜야한다.

레드라인은 한 국가—여기선 러시아—가 다른 국가의 행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다고 그어놓은 선이다. 만약 서방 국가들이 이 선을 넘는다면 러시아는 새롭고 더 위험한 방식으로 이에 반응할 것이다. 즉 레드라인은 상황을 순식간에 악화시킬 수 있는 버튼과도 같다. 그래서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의 레드라인을 정확히 알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다시 말해 러시아의 레드라인은 러시아가 아니라 상대방인 서방 국가들을 제약하는 기준이 된다.

레드라인을 이렇게 이해하는 건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우선 위와 같은 해석은 레드라인을 한 국가의 외교정책에서 고정된 특성으로 여긴다. 레드라인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생각하는 건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레드라인은 얼마든지 지웠다가 새롭게 다시 그을 수 있는 선에 가깝다. 실제로 “어떤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던 국가의 말이 순식간에, 급격히 바뀌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발언은 물론이고, 국가가 믿는 바도 금방 바뀌는 게 외교의 이치다.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건 미국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레드라인”이라고 명백히 경고했다. 시리아는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군은 이듬해 사린이라는 신경가스를 이용해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했다. 수많은 인권 단체가 이 문제를 보고했지만, 미국은 거의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탈레반이 탈환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을 몰아낸 뒤 지난 20년간 수천억 달러를 들여가며 안간힘을 다해 지켜온 레드라인이 바로 탈레반의 부활과 카불 입성이다. 그러나 미국 외교정책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비용 편익 분석의 기준이 바뀌자 절대로 인정할 수 없던 레드라인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다. 사실 레드라인이란 지정학적 환경에 아로새겨진 계시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여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에 가깝다. 헨리 템플과 비스카운트 팔머스톤이 말했듯 국가의 이익이란 영원한 것일지 모르지만,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가 하는 특정 행동은 그때그때 다른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환경이란 상대적인 힘의 차이, 주변의 위협에 대한 인식, 국내 정치 상황, 전반적인 글로벌 트렌드를 아우른다. 그러므로 국익을 위한 외교란 적국 혹은 경쟁국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레드라인을 최대한 우리한테 유리하게 바꾸는 일이다.

상대방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할지 지레 겁먹어서 스스로 행동을 제약한다면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전략을 절대로 짤 수 없다. 반대로 상황과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상대방이 우리 목표에 맞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게 중요하다.

레드라인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문제는 또 있다. 선을 넘었다가 적국을 자극해 갈등이 증폭되면 어쩌나 걱정하다 보면, 자연히 상대방 국가가 맞닥뜨릴 위험과 딜레마를 우리가 직면할 문제보다 우선시하는 주객전도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갈등의 증폭이란 이전에는 너무 위험해서 고려조차 하지 않던 길을 모두가 더 위험해지는데도 선택하는 상황을 뜻한다. 갈등의 증폭은 어디까지나 효과와 비용, 위험을 고려해 내리는 선택이지 상대방이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곧바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갈등을 증폭시키는 선택을 할 때 당사자가 치러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이 선택을 하지 못하게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레드라인에 집착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휘둘리기 쉬워지는 것도 문제다. 누구든 쟁점을 우리의 근원적인 이익이 걸린 중요한 문제로 삼음으로써 상대방의 행동과 욕망을 억제하려 할 것이다. 갈등이 증폭되는 걸 정말로 바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보니, 실제로는 도발할 의도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고 엄포를 놓는 일만 늘어난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해야 러시아에 대응하는 좋은 정책을 짤 수 있다. 러시아의 레드라인이 무엇인지 신경 쓰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러시아가 보유한 핵무기를 사용해 갈등을 증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서방은 러시아를 자극하는 게 부담되고 두렵다는 이유로 스스로 손발을 묶거나 우크라이나 뒤에 숨어선 안 된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이용해 러시아의 야욕을 억누르고 꺾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면 정확히 어떤 결과가 날 것이며, 그 대가를 어떻게, 얼마나 치르게 될지를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여러 차례 보유한 핵무기를 들먹이며 핵 위협을 가했다. 지난해 11월만 해도 푸틴이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를 강제로 러시아 영토에 병합한 지 6주 만에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에 빼앗겼던 도시 헤르손을 탈환하자 핵무기를 언급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실행 가능성이 희박한 푸틴의 엄포에 굴하지 않았다.

레드라인이라는 개념은 물론 쓸모가 있다. 협상에 관한 연구에서 레드라인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였는데, 여기서 레드라인은 한 나라가 받아들일 만한 협상의 최소 요건이다. 상대방이 이 조건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도 되는 기준이 레드라인인데, 이때 레드라인은 고정돼 있다. 레드라인이 고정돼 있다면, 상대방의 레드라인을 파악하는 건 협상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1922년 미국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해 일본의 레드라인을 훤히 꿰뚫고 있었고, 이는 워싱턴 해군협정을 미국에 유리하게 맺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몇 번 잘 된 협상의 교훈을 모아 훨씬 더 복잡하고 변수가 많은 지정학적 경쟁에 섣불리 접목하면 안 된다. 러시아가 핵무기를 이용해 갈등을 증폭하려는 상황은 분명 위험하고, 우리는 이를 아주 면밀히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불가피하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서방과 우크라이나는 명심해야 한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 러시아에 레드라인이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매번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그들이 처한 위험과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얻을 이익을 비교해 왔다. 서방은 계속해서 러시아가 서방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인식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게 외교의 역할이다.

이미 미국이 정확히 이런 일을 해낸 적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핵무기를 두고 가장 위험하게 대치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소련의 상황은 며칠 사이에도 널을 뛰었다. 소련은 끝내 서방이 선호했던 방식을 받아들였다. 이때 미국이 소련의 레드라인을 너무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못한 방식으로 위기를 풀었을 테고, 안보는 물론 우방의 신뢰까지 잃었을지 모른다.

물론 반세기도 더 전에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던 소련보다 지금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는 데 더 중요한 명운을 걸었고,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원리는 같다. 1962년 미국은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쿠바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이 소련으로서는 마뜩잖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핵무기를 계속 두고 미국과 대치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점을 이해시켰다. 마찬가지로 지금 서방은 푸틴을 설득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우크라이나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편이 계속 싸우는 것보다 러시아가 피해를 덜 받는 선택이란 점을 말이다. 전쟁이 오래갈수록 자신의 정권이 위험해진다는 걸 이해하면 푸틴은 서방의 설득에 귀를 더 열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면 내부 결속력이 약해지든 갈등을 통제할 수 없게 되든 푸틴 정권이 위험해질 만한 여러 요소는 더 불거진다. 푸틴에게 정권 유지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몇 안 되는 가치다.

지금 미국은 세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우선 미국은 스스로 선을 긋고 이를 공표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지만 어떤 무기는 제외한다거나 어떤 전략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굳이 밝히지 말아야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선택지를 버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이 점을 간파한 러시아는 계속해서 미국의 행동을 제약하려고 더 위험하고 공격적인 길을 택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이 길어지고 그 피해는 커지는 길이다.

둘째, 미국과 동맹국들은 시간이 러시아 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푸틴은 여전히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과 서방이 불리한 형세라고 믿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방은 더 적극적으로 경제적 우위를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더 강도 높은 제재로 러시아 경제를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모두 열세에 처한 채로 전쟁을 지속하는 건 푸틴 정권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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