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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쓰기 전이라면…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북적북적]

심영구 기자

입력 : 2022.10.23 07:10|수정 : 2022.10.24 11:31



[골룸] 북적북적 359 : 사표 쓰기 전이라면…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이 비정한 가족 드라마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제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자는 해충이다. 사사로운 사정이 어떠하든 모름지기 사회의 일원이라면 노동을 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이렇게만 보면 [변신]은 그야말로 최악의 공포소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레고르는 왜 변신을 했나?"

살다보면 누구나 고민, 갈등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런 거 속 시원하게 정답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누가 옆에서 "책 속에 답이 있다!" 외친다면? 뜬금없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세상에 많고 많은 책이 있는데 그중에 제 문제에 대한 해답이 설마 없겠어요? 그러면 또다시 고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책 가운데 답이 어디에 있는지, 또 이게 정말 그 문제의 답인지는 어떻게 찾지? 뭐 하나도 쉽게 넘어가는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책, 특히 고전을 읽으면 인생의 지혜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전집을 사서 1권부터 읽어나가는 것도 좀 그렇고(제 어릴 적 독서법 중 하나이긴 했습니다만)... 그 책을 다 읽은 선독자가 조근조근, 재미나게 안내해준다면 어떨까요. 오늘 북적북적에서 읽는 책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수은 작가의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입니다.

작가는 베테랑 외국문학 편집자로 20여 년 일해왔고 오르한 파묵 같은 세계적 거장을 국내에 다수 소개해왔다고 합니다. 편집자이자 번역자이면서 작가입니다.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는 이력의 소유자인데 52권의 책을 추려서 멀리는 2천 년 전 호메로스부터 가까이는 정세랑 작가까지 큐레이션해 소개합니다. 각 글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가슴속에 울분이 차오를 때는', '통장 잔고가 바닥이라면',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듭니다'...
 
"빵 한 덩이를 훔쳐 십구 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된 불운한 남자의 이야기로 흔히 알려졌지만, 사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많은 소설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워낙 폭넓은 주제를 아우르고 있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고, 포인트는 이거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면 결심해 보자. 나는 [레미제라블]을 다 읽은 다음 날 사표를 낸다. 이 책을 못 끝내면 퇴사도 없다! 퇴사를 하려면 이 정도 기개는 가져야......


2476페이지를 읽어 나가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인생, 사랑, 가족, 미래, 사회, 정치, 경제, 도덕, 법과 정의, 신과 종교를 사유할 충분한, 아주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얼어붙은 심장을 깨부수는 대포와 같은 문장들을 부단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표 쓰기 전에 읽는 책>에서
 
"윤직원의 좌절을 보면 통쾌함과 착잡함이 교차한다.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받는 마음은 인간적이다. 하지만 나의 불운한 처지에 다른 누군가 안도하고 있다면, 그때도 인간적이라고 여겨 줄 수 있을까. 자신의 불행에만 골몰하면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위험한 사람이 되고, 자신의 행복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부도덕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존재인 한, 우리에게는 서로 들키지도 드러내지도 말아야 할 인간성의 그늘이라는 게 있다." -<왜 나만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가>에서

여기 소개된 책들을 설사 다 읽었더라도, 읽지 않았더라도, 들어본 바 없어도 관계없습니다. 통장 잔고가 0이거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나 사람들과 어울리기 너무 힘들어야만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책을 매개로, 고전을 매개로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기획력과 독서력이 우선 놀랍고, 그러면서도 묵직하지만은 않게, 가볍지만도 않지만 유머러스하게 접근했다는 게 흥겹습니다. 저마다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읽을 수 있겠습니다.
 
"울분이 치솟을 때 시간을 두고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책이 뭘까 생각해 본다.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자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바로 떠오른다. 이 웅장한 고대 그리스 서사시는 한 사내의 울분으로 시작해서 울분으로 끝나는 전쟁문학이다.


'약점'을 상징하는 아킬레스건으로 더 널리 알려진 영웅 아킬레우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제우스를 능가할 아이라는 신탁 때문에 나자마자 신의 타깃이 된 아들을 보호하려고 엄마인 님프 테티스는 신생아를 스틱스강에 담갔다 꺼내 불사신을 만든다. 하지만 손으로 잡고 있던 발목만은 지하수 코팅이 입혀지지 않는 바람에 결국 발목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
-<가슴속에 울분이 차오를 때는>에서
 
"차가운 텅 빈 우주에 희망을 거느니 차라리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분해하는 박테리아 연구의 조속한 성공을 기원하겠다. 반찬 그릇에 랩을 씌워 보관하는 습관을 버릴 것이고, 포장을 종이로 대체한다는 친환경 마케팅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패턴과 색상이 다른 에코백을 이것저것 바꿔 들고 다니며 지구를 지킨다고 착각하지 않겠다. 오늘 저녁밥은 남기지 않을 양만큼만 덜어 담을 것이고, 커피 원두를 사러 갈 때는 꼭 유리병을 챙겨 가겠다. 그렇게 평범해도 시작은 무엇이든 새롭다."
-<새로 시작하고 싶어요? 그럼,>에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 건 워낙 책을 읽지 않으니 사계절 중 이때라도 읽으라는 명분을 준 걸까요. 아니면 옛날엔 대나무, 죽간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봄에 죽순이 나고 대나무를 책 재료로 활용할 수 있는 시기는 가을이니 그래서 신간이 우르르 쏟아지는 때가 가을이었던 걸까요, 혹은 추수가 끝나서 여유가 있는 때라서 저 말이 나온 걸까요. 사실 가을은 뭘 해도 좋은 계절인데 그 좋은 계절이 너무 짧아진 듯하여 아쉽기만 합니다. 이런 가을의 한복판에 읽기에 맞춤하고 그래서 시급한 책입니다.

*출판사 민음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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