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지나치게 복잡하고 고단하게 느껴져 유치함에서 흘러나오는 천진한 힘이 필요한 날이면 우유에 시리얼을 붓는다. 그 한 그릇 속에는 나의 유년이 담겨 있다. 이제는 원한다면 언제든 과자를 먹을 수 있는 성인이지만 시리얼을 먹을 때만큼은 어린애의 마음으로 돌아가 "우와! 아침부터 과자 먹어!"를 외치고는 신나서 현관을 나서는 것이다. 그런 날은 대개 괜찮고 괜찮다." -김혼비 <어쩌면 이건 나의 소울푸드>에서
"나 좀 쩔지! 너 이거 먹으면 기운 확 날걸?"
의기양양한 J의 말과 함께 사골 육수에 기존의 라면을 합친 사리곰탕면이 식탁에 놓였다. 뽀얀 국물에 가려 면발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뿌연 눈물에 가려 국물도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솔직히 그날의 맛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건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는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이 무너져 있던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 김혼비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에서
"...나는 돌잡이 때 명주실과 연필을 잡았다고 한다. 오래 살라고 둔 명주실과 공부 많이 하라고 둔 연필을 잡고도 잔병치레 많고 편식이 심하고 공부보다는 공상에 더 관심이 많은 나를 양친은 매우 오랫동안 걱정하셨는데, 어쩌면 나는 오래 살며 공부를 많이 하려는 게 아니라 명주실 같은 흰 소면을 연필 같은 젓가락으로 건져 먹는 국수 러버가 되려고 그 둘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 박서련 <면식의 흐름>에서
"네 사람의 백팩이 다 불룩했다. 다 먹을 것이었다. 내심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챙겨서 뭐 하지, 내려올 때도 고스란히 다 짐이 될 것 같아,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산이었음을 그리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계속 컵라면만 생각하며 산을 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로 뒤덮인 공중의 비현실적 이미지도, 눈이 만들어낸 나무의 절경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정말 행복했지만, 그것이 컵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을 능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나조차도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평소에 컵라면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 요조 <가장 중요한 등산 장비>에서
"이거 진짜, 뻘짓이네."
그랬다. 이거 진짜, 뻘짓이었다. '뻘짓 하고 있네'라든가 '뻘짓 좀 하지 말고' 등의 표현을 수없이 듣고 쓰며 자랐음에도 '뻘짓'이 진정 무얼 뜻하는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뻘에서 뭐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채 하염없이 호미질, 혹은 삽질을 하는 모습을 우리 선조들은 '뻘짓'이라 칭하고 비웃었던 것이다(라고 당시엔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정말 이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여기저기 파봐도 도통 뭐가 나오질 않으니 힘도 안 나고. 뭐랄까, 가성비가 떨어지는 행위였다. 금속 탐지기나 수맥 탐지기처럼 뭘 감지하고 쫓고 이런 게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 아니, 그냥 조개 사 먹으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자라나는 것이다.
- 핫펠트 <뻘짓>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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