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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칼럼] "더하고, 빼고, 살리고, 죽이고"…스크린에 핀 문학꽃

김지혜 SBS funE

입력 : 2017.09.05 11:52|수정 : 2017.09.05 11:52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 수상에 빛나는 영국의 작가 줄리언 반스는 말했다.

"영화는 책을 배신해야 한다"

자신의 대표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영화화한 리테쉬 바트라 감독의 짐을 덜어준 말이었다. 그러면서 "영화는 절대 책과 똑같아서는 안 되고, 책의 내용을 배신하는 것이 영화감독의 본분"이라고 부연했다.

이 말은 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라도 '제2의 창작'은 필수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설을 그대로 영화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문학에서 영화로, 활자에서 영상으로 이동하는 순간 감독의 색깔을 더한 재창조가 필요하다는 무언의 당부도 포함돼 있다.

말은 쉽다. 그러나 황금 보화를 싼다고 모두가 비단 보자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면 보자기 때문에 황금 보화도 빛을 잃을 수 있다.

이야기를 더하고 빼는 다이어트, 인물을 살리고 죽이는 생사의 과정을 거쳐 도착한 영화는 강력한 팬덤인 독자와 신규 고객인 관객의 보다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된다.  
[연예칼럼] '더하고,빼고,살리고,죽이고● 소설의 영화화…소재의 보물상자 

소설 원작의 영화화는 국·내외를 막론한 추세다. '더 새롭고', '더 재밌는' 이야기를 찾는 영화계에 문학만큼 좋은 활로가 없다. 문학은 장르와 소재의 경계가 없는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게다가 베스트셀러라는 뱃지가 달린 원작은 두터운 독자층을 관객으로 모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상반기 '석조저택살인사건'(원작 '이와 손톱')을 시작으로 하반기 '살인자의 기억법', '남한산성', '7년의 밤', '골든 슬럼버' 등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개봉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설경구)이 새로운 살인범(김남길)의 등장으로 잊고 있던 살인 습관이 되살아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범죄 스릴러. 쉽고 흡입력 있는 문체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정통 사극으로 이병헌과 김윤석이 주연을 맡았다. '문장의 마술사'로 불리는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7년의 밤'은 우발적 살인으로 모든 걸 잃게 된 남자(류승룡)와 그로 인해 딸을 잃고 복수에 나선 남자(장동건)의 7년을 그린 영화. 최근 문단에서 장르 문학 신드롬을 일으킨 정유정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겼다.
[연예칼럼] '더하고,빼고,살리고,죽이고● 소설은 흥행 보증수표? 잘못 건드리면 낭패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한 달에 걸쳐 음미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는 게 소설의 매력이다. 이야기는 거대하고, 묘사는 화려하며, 행간의 의미는 넓고도 깊다. 언어의 마술인 문학과 영상의 마술인 영화는 절묘한 파트너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동안은 궁합이 썩 좋지 않았다.

'완득이'(김려령作, 531만 명), '도가니'(공지영作, 466만 명) 정도만 흥행에 성공했을 뿐 '은교'(정지우作, 134만 명), '두근두근 내인생'(김애란作,162만 명),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作, 83만 명), ''내 심장을 쏴라'(정유정作, 38만 명),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기욤 뮈소作, 116만 명), '석조저택 살인사건'(빌 S. 밸린저作, 35만 명)등 대부분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캐스팅 미스부터 각색 실패, 연출 미흡 등 이유는 다양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 씨는 "영화가 소설의 서사를 공유한다고 해서 소설의 성공을 영화로 옮겨올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독자가 기대하는 바와 관객이 기대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면서 "소설은 주관적인 시선, 내면의 이야기를 해도 허용 가능한데 영화는 선명한 이미지로 대체되는 반면 문체의 매력은 사라진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각색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예칼럼] '더하고,빼고,살리고,죽이고● 각색의 중요성…더하고 빼고, 살리고 죽이고

소설을 영화화 할 때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뿐 아니라 감독으로서 게으른 일이다. 제 2의 창작이 필요하다. 문학의 문법과 영화의 문법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감독은 주요 인물을 넣고 빼거나, 시점과 결말을 바꾸는 등의 변주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투영한다.

일례로 오는 6일 개봉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이 병수(설경구)의 살인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으로 그린 것에 반해 영화는 이유있는 살인이라는 동기를 부여했다. 이는 관객을 인물에 밀착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또 원작에서 상징적이지만 비중은 크지 않았던 태주(원작의 이름은 '주태', 김남길)를 주요 인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병수(설경구)와 은희(설현)의 관계도 원작보다 밀도 높게 다룬다.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소설이 병수의 기억과 망각을 이용해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1인 심리극을 만들어냈다면, 영화는 주요 인물에 살을 붙여 캐릭터를 부각했고, 스릴러적 성격을 강화했다. 마무리 역시 닫힌 결말을 택했다. 소설에 비해 선명한 각색이지만, 안 좋게 말하면 전형적이다.

흥미로운 각색과 절묘한 캐스팅으로 원작을 뛰어넘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도 있다.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영화화 한 '아가씨'다. 박찬욱 감독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치환했으며, 원작의 핵심 반전 4가지 중 출생의 비밀을 비롯한 3가지를 버렸다.

그 결과 두 여성의 연대로 이뤄낸 자유와 해방 그리고 여기에 강렬하고 집요한 에로티시즘으로 구현된 사랑의 완성을 보여줬다. 원작과는 또 다른 매력의 수작이었다.
[연예칼럼] '더하고,빼고,살리고,죽이고● 캐스팅의 난제…싱크로율vs연기력vs신선도

캐스팅도 중요한 요소다. 이미 독자 각자의 뇌리에 형상화된 캐릭터를 특정 배우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 그 적합도는 영화에 호기심을 가지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특히 강력한 팬덤을 가진 원작을 영화화할 때 캐스팅에 대한 갑론을박이 크다. 

배우의 외모, 성격, 필모그래피 등 내·외적 인상은 캐릭터에 일정 부분 투영된다. 이는 몰입 요소이기도 하지만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가령 영화 '은교'의 이적요는 노인을 연기하는 박해일의 이미지가 투영된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주름 분장 아래 존재하는 박해일의 존재감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다.

때때로 사건과 인물에 대한 문제 의식을 희석시키기도 한다. 소설 '은교'가 가진 매력 중 하나인 윤리적 딜레마가 영화에서는 무디게 다가오는 것도 그 이유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다.

이러한 이유로 극의 주요 인물을 신인으로 캐스팅하는 경우도 많다. '아가씨'의 김태리와 '은교'의 김고은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소설 속 캐릭터가 신인 배우의 여백에 제대로 이입된 경우다.  

소설의 독자가 영화에 우호적일 것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 오히려 애독자들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영화를 평가한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감독과 배우는 독자이자 관객인 시어머니와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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