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 안치돼 있는 마르코스 (사진=AFP연합뉴스)
"마르코스 독재 치하에서 갖은 고문에 성폭행까지 당했다. 그런 독재자를 국가영웅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또다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지난달 31일 필리핀 대법원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독재시절 피해자들이 울분과 호소를 쏟아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승인한 마르코스의 마닐라 영웅묘지 이장 계획을 막아달라는 6건의 대법원 청원을 심리하는 자리였다.
청원 신청자들은 1970∼1980년대 마르코스 계엄 시절 7만5천 명 이상이 경찰과 군에 끌려가 고문, 감금 등으로 인권을 유린당한 일을 떠올리며 마르코스의 영웅묘지 안장에 반대했다고 온라인매체 래플러 등 현지 언론들이 1일 전했다.
에타 로살레스 전 필리핀 인권위원회 위원장은 "강간에 전기고문을 당하고 러시안룰렛(총알을 한 발만 넣고 자신을 향해 총을 쏘는 것)까지 해야 했다"며 당시 자신이 겪은 일을 회고했다.
그녀의 여동생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불법 서적 소지 혐의로 체포돼 성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토지개혁 운동가였던 트리니다드 헤레라는 "그들이 내 블라우스를 벗기고 전기충격을 가했다"며 "전기고문은 기절할 때까지 6시간이나 계속됐다"고 진술했다.
이바라 구티에레스는 18세 대학생일 때 학생회 문을 다시 열려다가 체포돼 7일간 고문을 당하고 러시안룰렛도 했다고 말했다.
에드셀 라그만 하원의원은 마르코스 계엄 시절 실종자 가족들을 대표해 "마르코스는 폭군이었다"면서 "그의 영웅묘지 안장은 독재자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국가 분열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치토 가스콘 현 인권위원장은 "국가는 계엄 시절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를 또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고 거들었다.
대법관들의 입장은 엇갈리고 있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을 끈다.
테레시타 레오나르도 데 카스트로 대법관은 "전 국방부 장관의 배우자조차 영웅묘지에 안장돼 있다"며 안장 자격을 판단할 수 있는 기구·기관이 없다는 허점을 지적했다.
반면 안토니오 카르피오 대법관은 "마르코스는 국민에 의해 불명예 퇴진했기 때문에 영웅묘지 안장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기 집권에 나섰다가 1986년 '피플 파워'(민중의 힘) 혁명으로 사퇴하고 하와이로 망명, 1989년 72세를 일기로 숨졌다.
현재 마르코스 시신은 미라 형태로 필리핀 일로코스 노르테 주의 고향 마을에 안치돼 있다.
애초 마르코스 가족들은 9월 중순 영웅묘지 이장을 계획했지만, 대법원 심리로 불투명해졌다.
앞서 마르코스 가문과의 정치적 인연을 언급하며 이장을 허용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대법원 판단을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