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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인이 사는 법, 의사 포기하고 월급 13배 민간식당 종업원 택한 청춘

입력 : 2016.06.20 09:13


지난 3월 역사적인 쿠바 방문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첫 저녁 식사 장소로 연회장이 아닌 쿠바 아바나의 민간 식당 '산 크리스토발'을 찾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등심 스테이크를 먹었고 로커 믹 재거, 팝가수 비욘세, 배우 시거니 위버 등 유명인들이 방문한 산 크리스토발은 쿠바의 민간 식당을 뜻하는 '팔라다르'(paladar) 중 가장 이름난 곳 중 하나다.

산 크리스토발을 비롯한 팔라다르는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확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59년 혁명 이후 적대시하던 미국과 수교하며 50여년 만의 일대 변혁기를 맞은 쿠바 사회에 팔라다르를 비롯한 자본주의가 스며들면서 전통적인 직업 세계도 변화하고 있다.

확장 일로의 관광업을 거쳐 쏟아지는 외화를 먼저 접하는 이들은 부유해졌지만 전통적인 고급 직업군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

모든 것이 국영이던 1990년대 초반 생겨나기 시작한 민간 식당은 갖은 규제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해 이제는 수도 아바나 시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돈이 몰리는 민간 식당은 곧 이념적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쿠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장 중 하나가 됐다.

◇ 의사 수업 마치고 민간 식당에 취직한 20대 19일(현지시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만난 한 민간 식당 종업원 아드리아나(22·여)의 삶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름의 성을 밝히기를 꺼린 그는 최근 아바나 시내의 한 식당에 취직하기 전 한때 의사를 꿈꿨고 실제 의사로 일할 자격까지 얻었다.

아드리아나는 "쿠바엔 다양한 형태의 의료 인력 양성 과정이 있는데 나는 16∼19살 4년 동안 '의료 집중 과정'을 다녔다"며 "졸업했으니 의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떠올렸다.

이어 "하지만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할 수 없으셨고 아버지는 외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시느라 일을 관두셨다"며 "결국 내가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학창시절 치과 의사를 꿈꾸며 공부만 했던 그는 졸업 후 5개월간 식음료 접객업을 가르치는 학원에서 일을 배운 다음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아드리아나는 "사람 몸속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항상 웃는 얼굴로 접시와 잔을 나르기가 쉽지는 않았다"면서도 "부모님과 아직 학생인 동생을 포함해 네 가족이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있으니 만족한다"고 말했다.

주로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민간 식당이라는 직장과 쿠바의 이중 화폐 덕분에 식당 종업원인 자녀 한 명이 부모 부양까지 할 수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내 경우 하루 일당이 20∼22CUC 정도"라며 "기본 고정급 12CUC에 매출액의 10%를 인센티브 개념으로 받고 여기에 더해 손님들이 주는 팁을 종업원들이 균등하게 나눠 가지는 식"이라고 말했다.

'태환 페소'로 불리는 CUC는 쿠바 정부가 외국인용 화폐로 도입했으며 미국 달러와 1대1 고정 환율로 운영된다.

기존 쿠바 화폐인 CUP와 비교하면 1CUC은 24∼25CUP 가치를 지닌다.

의사를 비롯한 공무원들이 CUP로 월급을 받고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이 정부에 의해 운영되는 쿠바에서 CUC로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곧 고소득을 의미한다.

아드리아나는 "쿠바에서 의사는 공무원 신분이라 급료를 CUP로 받으며 초봉은 560CUP 정도"라며 "의사 일을 해서는 생활이 어렵겠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 충분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560CUP는 약 23CUC(약 2만7천 원)가량으로 아드리아나가 일당으로 받는 돈과 비슷한 액수다.

한달에 보름을 일하는 아드리아나가 하루 평균 21CUC을 번다고 가정하면 한달에 약 315CUC(약 36만9천 원)을 버는 셈이니 의사보다 13배 이상 많은 소득을 올린다.

의료 선진국을 자처하고 전 국민 무상 의료를 표방하는 쿠바에서 의사는 분명히 사회적 존경을 받는 좋은 직업이었지만 지금은 급여에서 민간 식당 종업원에게 현격히 밀린다.

아드리아나는 "경력이 긴 의사들은 월급 3천CUP(약 125CUC·14만6천 원) 이상을 받기도 한다"며 "하지만 어떻게 됐든 지금 내가 한 달에 버는 돈에는 못 미친다"고 했다.

이어 "더욱이 최상위급 팔라다르에선 종업원이 하루 100CUC씩 번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지금 식당에서 경력을 쌓고 기회가 된다면 더 큰 식당으로 옮기고 싶다"고 바랐다.

부모님 중 한 명이라도 일을 해서 가족이 여유 있게 살았더라면 아드리아나는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물론 의사를 했을 수도 있다"며 "사람을 살리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람이 있는 일 아닌가. 4년을 바쳐 열심히 공부했고 내게는 학교 공부도 무척 재밌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도 "그 월급으로는 글쎄…. 지금 급여로 누리는 생활수준을 생각하면 어떤 선택을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 자본주의적 개방의 상징이 된 팔라다르(민간 식당) 미래 엘리트에 속하는 예비 의사를 끌어올 만큼 매력적인 일터가 된 민간 식당이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20년 이상이 걸렸고 여전히 큰 불확실성과 맞서고 있다.

1989년 구소련 붕괴 이후 지원이 끊기면서 경제가 무너지자 쿠바 정부는 1993년 9월 경제 개혁안을 마련, 이미 조금씩 생겨나던 식당 등 민간의 소상공업을 합법화했다.

지금도 국영 식당은 물론 술집이나 나이트클럽 등이 곳곳에서 성업 중일 정도로 국민의 여가 생활까지 국가가 공급하는 쿠바에서 이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특히 식량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부 배급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먹을거리에 대한 수요를 비밀리에 채워주던 민간 식당들을 법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민간 식당을 합법화하면서도 이들을 '신흥 부자 집단', '식인 피라니아' 등으로 비난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합법화 석 달 후인 같은 해 12월 경찰이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식당 사장들을 무더기 체포하는 대규모 단속이 이뤄져 100곳 이상이 폐쇄된 것을 시작으로 꾸준한 탄압이 이어졌다.

사실상 준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격하고 구체적인 규제들이 단속의 근거가 됐다.

최근까지 민간 식당의 외부 인력 고용은 금지됐고 오직 '가족 보조자'만 둘 수 있었다.

이 '가족 보조자' 규정은 한때 '반드시 최소한 최근 3년간 같은 집에 거주한 가족이거나 공동 거주자여야만 한다'는 구체적 내용으로 악명 높았다.

식당 내에 의자를 12개까지만 둘 수 있도록 해 규모를 제한하거나 TV 설치 금지, 라이브 음악 연주 금지 등 온갖 규제가 생겨났다.

12개에 불과한 좌석의 빈자리가 날 때까지 고객들이 기다리면서 가볍게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바(bar)를 두지 못하게 한 기상천외한 규제도 있었다.

식당들은 주방 뒤쪽에 비밀 공간을 마련하거나 직원 고용을 신고하지 않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대응했고 이에 따라 정부는 규정 위반을 근거로 단속 수위를 높이는 악순환이 생겼다.

각종 규제에 높은 세율까지 더해지면서 경영이 악화한 민간 식당들이 점차 가격을 올리면서 쿠바인들의 수요를 채워준다던 초기의 취지는 사라지고 주로 외국인 관광객들만 민간 식당에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의자 50개, 직원 25명으로 한도가 늘어났고 가족이 아닌 사람도 고용할 수 있는 등 많이 개선됐지만 미국과 관계 정상화 논의가 한창 오가던 2014년에도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다고 한다.

쿠바 문화를 연구해온 미국 바루크대학의 테드 헹켄 교수는 '쿠바의 팔라다르, 모든 것이 금지됐지만 어떤 일이든 일어나는 곳'이라는 글에서 "쿠바 정부는 자신을 '관대한 지주'로 여긴다"고 평했다.

헹켄 교수는 "감사해 할 줄 모르는 세입자들이 혁명의 재산 위에서 사업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는 것"이라고 쿠바 정부가 행한 탄압과 규제의 심리적 배경을 설명했다.

이제는 쿠바 사회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단면이 된 팔라다르를 정부 차원에서 인정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쿠바 정부는 지난달 26일 "중소규모 사업체들의 법적 실체를 인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법적 실체'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팔라다르 등 민간 자영업체들의 법인격을 인정하고 이들이 하나의 기업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인정하겠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쿠바 아바나에 있는 아바나대학의 한 사회학 교수는 "타당하기도, 불가피하기도 한 방향"이라며 "인제 와서 수천 개에 달하는 팔라다르를 무시하거나 억제하려는 행동은 비현실적 접근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