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에 검정 테 안경, 그리고 깊게 패인 이마 주름살에 말쑥한 옷차림…. 63살 로니 데이비드 플랭클린 주니어는 그저 인상 좋은 동네 할아버지 모습이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 피고 석에 앉아 있는 그에게 배심원단이 혐의에 대한 결정을 하나하나 읽어나가기 전까지 그가 무려 10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10명…그것도 30년에 걸쳐 무고한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캘리포니아 주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마인 그를 현지 언론들은 ‘The Grim Sleeper’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Grim은 음산하다는 뜻이고 Sleeper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면서 몇 년간 지내다가 스파이로 활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즉, 살인을 하고 한동안 평범한 삶을 살다가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이중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 쓰레기 트럭 운전기사로 일했다가 후에는 LA경찰국 주차장 경비원으로도 일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88년, 흑인 여성인 에니트라 워싱턴에게 잘생긴 플랭클린이 접근했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한 그에게 이끌린 워싱턴은 그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인적이 없는 도로에 차를 세운 그는 갑자기 그녀 가슴에 권총을 당겼습니다. 그리고는 플랭클린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그녀 배 위에 올라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차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내버린 그녀는 지나던 다른 차에 의해 구조됐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용의자를 찾아내진 못했고, 결국 미해결 사건으로 종결 처리됐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과거 미해결 사건들을 수사해오던 LA 경찰국은 과학수사연구소가 전한 DNA 분석을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2002년과 2003년 그리고 2007년에 일어난 여성 피살 사건에서 동일한 사람의 DNA가 발견됐던 겁니다. 모두 살해된 여성의 가슴에 묻어 있던 매우 작은 타액 자국에서 발견된 것으로 세 여성이 같은 범인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확인된 겁니다. 1980년대에 비해 월등히 발전된 DNA 분석기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전담 팀이 꾸려졌고 과거 유사 사건의 수사 기록을 뒤지던 경찰은 1988년부터 발생한 사건 가운데 25구경 권총에 희생당한 여성들이 7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이 유사 사건 전과자들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모두 뒤졌지만 살해범의 DNA와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찰은 포기하지 않고 법원의 허가를 어렵게 얻어 일반인 DNA데이터베이스를 뒤졌습니다. 그 결과, 이 범인의 DNA가 플랭클린의 아버지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2010년부터 5년 여에 걸친 재판 동안, 변호사는 그가 그 여성들을 살해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배심원단은 검찰이 내세운 61명의 증인과 DNA 기록, 그리고 그의 집에서 발견된 사진 등을 통해 그가 치밀하고도 계획적으로 10명의 여성을 살해한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30년에 걸쳐 무려 10명의 무고한 여성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인 그에게 사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최종 선고는 오는 11일에 내려지게 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