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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여러분 혹시 '석호필'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요즘 세대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 남자 주인공인 스코필드의 국내 별칭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을 텐데, 사실 이 이름을 처음 쓴 사람은 영국계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과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의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을 마쳐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 석호필 박사가 한국 땅을 밟은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습니다. 내일은 3·1절이죠.
전병남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교회 안에 사람들을 몰아넣은 뒤 불을 질러 학살한 제암리 양민 학살사건.
현장에 직접 가서 사진까지 찍은 스코필드 박사의 헌신 덕분에 일제의 만행은 온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김재현/스코필드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 구두 밑의 굽을 뜯어서 필름을 넣거나, 소아마비 걸렸던 다리의 붕대를 풀고 붕대 속에 자료를 넣어서…]
캐나다 국적의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임하며 식민지 조선과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발음이 비슷한 '석호필'이란 한국 이름도 지었는데, "돌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호랑이처럼 한국의 독립을 돕겠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특히 3·1 운동도 글과 사진을 통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항/서울대 교수 : 3·1 독립운동이 있을 것이니까 그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독립운동가들이) 미리 부탁했었죠.]
일제에 의해 추방된 박사는 195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후학 양성과 가난 구제에 앞장섰습니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평소 소망대로 1970년 숨진 뒤에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 땅을 밟은 지 올해로 100년, 국가보훈처는 박사를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영상취재 : 박승원, 영상편집 : 박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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