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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세훈 파기환송심, 바람 잘 날 없는 재판

박하정 기자

입력 : 2016.01.12 15:57


아무리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시작한 재판이라고 해도 긴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이어질수록 관심은 식기 마련이다. 형사 재판의 경우 결심 때가 되면, 그러니까 재판 내내 이어지던 검찰과 변호인 측의 공방이 마무리되고 검찰이 피고인에게 어떠한 형을 선고해달라고 구형을 할 때가 되면, 다시금 잊혔던 재판이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물론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재판이라면 끊임없이 환기시켜야 하는 것이 기자들의 역할이지만, 기자들의 관심 역시 아무래도 첫 공판, 결심 공판, 선고 공판에 많이 쏠린다. 물론 공판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전에 언급되지 않던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거나 하는,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도 그런 경우다. 

● 사표를 낸 검사, 증언을 거부한 증인

어제(11일) 있었던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 5차 공판.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공소 유지를 담당해 오던 박형철 부장검사가 좌천성 인사 발령 통보에 사표를 던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열린 첫 공판이었다. 특별수사팀에서부터 사건을 도맡아오던 박 부장검사가 자리를 비운 검사석에는 김성훈, 이복현, 단성한 검사만 자리를 지켰다.

어제는 국정원 심리전단에서 일했던 국정원 직원의 증인 신문이 예정된 터라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 방청석과 증인석 사이에는 커다란 가림막이 쳐졌다. 증인석뿐만 아니라 양측에 앉은 검찰과 변호인, 그리고 재판장의 얼굴도, 방청석에서 바라볼 때는 대부분 가려졌다. 자연스레 어떤 질문과 답이 오가는지 기자들은 잔뜩 귀를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증인의 답변은 짧고 또 일관됐다.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자신의 범죄사실에 관해 형사처벌을 받을 우려가 있다면 법정에서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 어제 재판부도 이를 용인했다. 증언을 거부하겠다는 답변만이 이어지자 검찰 측은 마지막으로 증인에게 “일관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했는데, 오늘 출석하게 된 것 또는 증언거부권과 관련해서 국정원 상부나 관련자들에게 지시나 지침을 받은 적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 마지막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는 증인에게, 검찰 측은 ‘이 질문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 대상이 아니’라며 답변을 촉구했다. 재판부는 증인이 답변을 하지 않는 경우에 이를 강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재판부가 증인이 안 나오더라도 출석을 강제할 의사가 없고, 나오더라도 진술거부권을 광범위하게 행사하도록 용인해주는 것 때문에 모든 증인들이 다 증언을 거부하게 된 것 아니냐’고 맞섰다.

지난 재판에서 다른 국정원 직원들도 증언을 거부해 사실상 제대로 된 증언은 이번 재판에서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답변 촉구가, 재판부에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인지를 검찰 측에 반문한 뒤, 그것을 기각한 것이 아니라 증인의 답변을 강제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 2달 뒤에 재개될 재판… 새로운 재판부에서?

서면을 제출하는 데에 검찰 측이 날짜를 지키지 않은 적이 있는지 없는지, 말꼬리를 잡는 듯한 신경질적인 공방이 벌어지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다음 기일 지정을 두고 더 큰 공방이 벌어졌다. 재판부가 멀찌감치 3월로 다음 재판 날짜를 잡으려 한 때문이었다.

오는 2월에 있을 법관 인사로 재판부가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그리고 그런 상황을 감안할 때 지난해 말 나온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의견서 제출 및 검토 등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을 비난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재판에 넘겨진 육군 장교가 군사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었는데, 대법원이 이를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이 판결을 참조·검토할 것이고 또 검찰과 변호인 양측 모두에게 이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검찰 측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공판준비절차 때,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절차 진행을 서둘러 달라고 수없이 의견을 개진했는데도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다가 이제 와서 기일을 멀찌감치 잡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이번 파기환송심 재판이 시작된 이후 재판 진행과 관련해 검찰과 재판부 측은 거의 매 공판 때마다 공방을 벌여 왔다. 본격적인 공판 시작 전 공판준비절차에서, 재판부가 A4 용지 1장에 빼곡하게 담길 만한 길이의 질문을 법정에서 던지고, 이에 검찰 측이 곧바로 답을 하게 하는 장면이 자주 연출됐다.

검찰 측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답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질문을 사전에 출력해서 받아볼 수 없는지를 물었지만 재판부는 원래 방식을 고수했다. 쏟아지던 재판부의 질문 가운데 나온 ‘손자병법’ 질문에 박 부장검사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 밖으로 나갔다.

재판부가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병력을 움직이는 탄력적인 용병술을 써야 승리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내용에 대해 검찰과 변호인 측의 생각을 물은 것이다. 재판에서 다투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성을 마치 이 ‘탄력적인 용병술’에 빗댄 듯한 질문에 검사들은 반발했다.

3월까지 재판이 지연돼선 안 된다는 검찰 측 의견에 대한 재판부의 답은 간단했다. 대법원에서 법관 인사를 2월에 내는 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면 현재의 재판부는 변동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재판부가 다시 재판 기록을 검토하고 심리를 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집중적으로 심리를 해 재판부 변경 전에 일정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검찰 측 주장에도 재판부는 다음 재판 기일을 애초 밝혔던 것처럼 3월 14일로 지정했다.법원 
● '모든 것을 따져보겠다'…맹목이 되어선 안 돼

빨리 하는 재판, 논쟁 없는 재판이 능사는 아니다. 오랜 기간의 심리가 필요하고 치열하게 다퉈봐야 하는 첨예하고 복잡한 문제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대법원은 원 전 원장의 국정원법 위반 혐의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정확한 유무죄 판단을 내리지 않았고, 사실관계 확정 부분의 오류를 지적하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기에 파기환송심이라 해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따져볼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겠다는 재판부의 입장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따져보겠다’는 목적에 맹목적으로 매달려서는 곤란하다. 절차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의 의견이 충분히 공유되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즉 절차적인 정당성이 담보됐을 때 종국적인 결과의 정당성과 그것이 주는 권위가 더 높아진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