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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재미없는' 대선 토론회…왜?

남승모 기자

입력 : 2015.12.23 18:30


내년 총선을 넉 달여 앞두고 정치권이 뜨겁습니다. 제가 연수 중인 미국 역시 내년 말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후보 간 각축전이 치열합니다. 오늘 저녁 뉴스에서도 후보들의 동정과 판세 분석이 넘쳐 나더군요. 아직 1년 가까이 남았지만,미국은 선거 절차가 우리나라와 달리 복잡하다 보니 당내 대선 후보 토론회도 벌써 몇 차례나 열렸습니다.좀 지난 일이긴 하지만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역시 지난 10월 14일 CNN이 주관한 미국 민주당 1차 대선 후보 토론회였습니다(그때까지만 해도 트럼프의 비중이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습니다).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내년 대선 토론회로는 제일 처음 열린 것이어서 시작 전부터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저 역시 대선 취재를 몇 차례 경험한 바 있어 미국 대선은 어떻게 치러질까 궁금했습니다. 외신으로나 접했지 토론회 같은 긴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10월 14일 당일, 마치 영화라도 감상하는 기분으로 (연수 중인 관계로 아무런 취재 부담 없이)  CNN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느꼈습니다. 아! 정말 우리나라 대선 토론회와는 다르구나…
 
● 인신공격은 없다
 
CNN은 토론회 시작 전부터 대형 자막으로 토론회의 예상 이슈들을 추려 내보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이메일 스캔들’이었습니다. (국무장관 시절, 공무에 개인 이메일을 사용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 것 아니냐는 게 골자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논란이 됐음에도 힐러리 자신도 이를 확실히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내 대선 후보 토론회를 여러 차례 봐온 저 역시 이 문제가 이날 토론회의 가장 큰 쟁점이 되리라 예상했습니다. 비록 당내 토론회이기는 하나 어차피 당내 경선에서 이기지 않고는 대선 후보로 나설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진행자의 질문이 나왔을 때 후보들 어느 누구도 힐러리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종종 보게 되는 그런 인신공격성 발언도 아니고 공무상 실수인 만큼 얼마든지 따지고 들만도 한 데 어느 누구도 이를 쟁점화하지 않았습니다.
 
힐러리 개인의 스캔들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미국민들을 괴롭히는 일자리, 중산층 붕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자고 역설했습니다. 후보 간 이전투구의 장이 될 수도 있었던 사안을 자신들이 함께 몸담은 민주당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알리는 기회로 활용했습니다.최종 경쟁 상대인 공화당을 의식한 전략적 발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당내 경선 토론회에서조차 늘 서로의 약점 찾기에 골몰하는 우리 정치권의 토론회와 비교할 때 정치 문화, 혹은 수준의 차원에서 솔직히 좀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이후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우리 나라 대선 후보 토론회의 단골 메뉴인 후보 본인이나 가족에 대한 도덕성 논란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후보들끼리 인신공격을 하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사회복지, 총기규제, 이민자 문제, 외교정책 같은 정책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을 뿐입니다.
 
● ‘초(秒) 재기’도 없다
 
미국 민주당 대선 토론회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른바 ‘초 재기’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대선 토론회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타이머입니다. 후보마다 발언 시간을 정해놓고 이를 초과하면 진행자가 사정없이 잘라버립니다.
 
하지만 미국 민주당 토론회에 타이머는 없었습니다. 진행자가 주요 사안별로 질문하고 발언 기회를 주며 토론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정책적 쟁점이 생길 때면 후보 간 견해를 대비시켜 묻기도 했습니다.

토론 진행 동안 특정 후보, 그러니까 민주당 내 유력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발언 기회가 몰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일부 후보는 발언 시간이 너무 적다며 항의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 ‘토론’이 ‘토론’이 되기 위한 조건
 
더욱 놀란 것은 토론회가 끝난 뒤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관련 뉴스들이었습니다. 실시간으로 주요 발언들을 기사화해 홈페이지에 올렸던 뉴욕타임스는 토론회 후 후보 간 득실 분석과 함께 누가 토론회에서 발언 시간을 많이 장악했는지 정리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토론회에서 공정한 운영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요? 토론회를 왜 하는지 토론회의 목적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대선 후보 토론회는 유권자들에게 누가 대통령에 더 적합한지 충분한 판단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자립니다.
 
일방적인 정견 발표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후보에게 공정한 시간이 보장돼야 할 겁니다. 하지만 토론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토론은 후보자들 간의 경쟁입니다. 누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 하는 정치의 장입니다. 토론을 주도하고 이슈를 끌고 가는 것도 정치인의 역량이라면 역량이니 말입니다.
 
● 토론 규칙 변경이 쉽지는 않지만…
 
제가 여기까지 말하면 다들 그러실 겁니다. “그럼 대선 토론회를 중계하는 방송사들이 제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라고요.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앞서 제가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하냐’고 말씀드렸던 바로 공정성과 형평성 문제 때문입니다.
 
사실 토론회가 유권자의 판단을 도울 수 있게 진행돼야 한다는 당위론과 토론에 참여한 후보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론 모두 충분한 근거가 있는 얘깁니다. 다만 제가 미국의 사례를 통해 실질적 토론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형평성에 방점을 둔 지금의 우리 대선 후보 토론 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뭔가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올 만하면 진행자가 자른다’거나 ‘지지율과 관계없이 모든 후보에게 동일한 시간을 부여하는 건 형평성을 가장한 불공평 아니냐’는 등의 불만이었습니다.
 
‘후보자 간 형평성’과 ‘유권자에 대한 보다 명확한 판단 근거의 제시’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둬야 할까요? 결국, 유권자들이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가 판단의 가장 큰 잣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선까지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