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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저유가 속 조용히 웃는 '정유사'…왜?

정호선 기자

입력 : 2015.12.09 19:50|수정 : 2015.12.10 14:33

저유가가 수요 견인, 정제 마진 상승…'알래스카의 여름' 막기 위한 전략 필요


유가가 하락하면 피해를 보는 업종으로 흔히 조선, 건설, 철강, 석유화학, 정유 등을 꼽습니다. 유가 하락으로 산유국 경기가 얼어붙으면 해외 건설 수주가 줄고, 전 세계적 수요 감소로 유가가 떨어지는 것이니 경기 둔화 속 조선 수주나 철강 수출액이 부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유사들은 저유가가 되면 수출 물량이 줄어드는 데다가 ‘정제 마진’이 줄어 수익에 직격탄을 맞습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정유업이 수출 효자 산업이 된 것은 바로 정제 기술 때문입니다. 원유를 수입해 정제 과정을 거치면서 휘발유와 등유, 경유, 중유, 그리고 LPG, 나프타 등 각종 원유 부산물이 생산되는데, 이와 관련된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석유화학산업은 석유 제품이나 천연가스를 원료로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생산하고 그 원료로 합성수지나 합성고무 등을 만드는 산업입니다. 국제유가가 하락하면 사들이는 원유 가격이 내려가서 이득을 볼 것 같지만, 휘발유와 등유, 경유, 중유와 같은 석유 제품의 가격 역시 국제 유가와 연동해서 하락하기 때문에 수출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유사들은 안정적인 원료확보 차원에서 2~3개월 어치를 이전에 미리 사들여 탱크에 보관해놓는데요, 유가가 하락 추세라는 건 3개월 전 더 비싸게 산 원유로 석유제품을 생산해서 그 시점에선 가격이 내려간 채로 팔아야 하기 때문에 수익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유가가 고공 행진했던 2011년, 정유사 실적이 최고조로 치달았었는데요. 급기야 석유 제품이 조선, 반도체, 자동차를 제치고 전체 수출액에서 1위를 차지했었습니다. 2011년엔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에서 석유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10%에 달해 9% 정도였던 반도체를 앞질러 명실상부한 수출 효자 업종으로 인정받았었죠. 당시 4개 정유사는 각각 ‘산유국이 아닌 나라에서 수출 1위를 달성했다’면서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정제 기술의 우월성에다 고품질 제품 생산을 위해 설비에 꾸준히 투자를 한 점, 그리고 최대 수요처인 중국의 수요 감소에 대비해 아시아 신흥국과 중남미 등으로 수출을 다변화하려고 노력했던 점이 성과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급변합니다. 2012년과 2013년, 2014년, 3년 연속으로 석유산업은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유가가 하락 기조를 보인 때문입니다. 최근의 유가 하락 기조는 전 세계적 저성장 기조 속에 수요는 부진한데 공급이 과잉이라는 점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쉽게 추세가 반등될 수 없었던 거죠.

정유사들은 ‘아 옛날이여..’ 하며 마른 수건도 짠다는 심정으로 경비절감과 구조조정에 들어갔습니다. 상황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고, 과연 중국 석유 제품의 저가공세에다 저성장에 따른 전 세계적 수요 둔화 등으로 앞으로 정유 산업이 예전의 호황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습니다.

그러던 정유 업계에서 올해 좀 의아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3년간의 긴 터널을 지나 올해 실적이 흑자로 전환할 것이란 전망이 그것입니다.
 
  <정유 4사 실적 추이> 
  2011 2012 2013 2014 2015.
3분기
매출액 1,326,877 1,405,541 1,291,870 1,130,761 578,382
영업이익 29,715 -4,330 -159 -23,299 22,276
영업이익률 2.2% -0.3% 0% -2.1% 3.9%
 (단위:억원/자료: 석유협회)

석유협회에 따르면 2011년 정유 4사는 2조9715억 원의 영업수익을 올렸는데, 이듬해 바로 4330억원 적자, 이어 159억원 적자, 2014년엔  2조3299억원으로 적자 폭이 급격히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올해 3분기까지 실적이 이미 2조2276억원으로 완전히 실적이 급등했습니다.4분기 실적까지 합하면 영업이익 규모는 더 커질 전망입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2132억 원의 적자를 냈지만 올해는 1조9353억 원 흑자를 낼 것으로 추정되고, S-OIL은 지난해 2897억 원의 적자에서 올해 1조 1187억 원의 흑자 전환에 성공할 것으로 보입니다. GS역시 자회사 GS칼텍스의 실적개선에 힘입어 6270억 원의 흑자로 돌아설 전망입니다.)

그런데 올해가 어떤 해입니까? 국제유가가 역대 고점대비 74%까지 떨어져 두바이유는 7년 만에 처음으로 배럴당 30달러대로 하락하고 OPEC의 감산 합의 실패로 20달러대까지 추락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극심한 저유가 기조 속에서 어떻게 이런 실적을 올렸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저유가의 대표적 피해업종이었던 정유업이 올해 유독 실적이 호황을 보인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저유가가 소비 견인…수요 늘어

우선 값이 싸지면서 기름을 그만큼 더 많이 소비한다는 겁니다. 올 들어 국내 소비량은 크게 늘었습니다. 석유공사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5억 7074만 배럴로 작년에 비해 4.07% 증가했습니다. 증가 폭으로는 지난 5년 사이에 가장 큰 폭입니다.  

경유 소비도 11%나 늘어났습니다. 경유 가격이 낮아지고 경유 신차가 여러 종 출시되면서 경유 소비량은 계속 늘어나는 추셉니다. 당초 메르스 사태 때문에 이동량이 뚝 떨어져 소비량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저유가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면서 휘발유와 경유 소비가 크게 증가한 것입니다. 정유 업계는 매년 석유 제품 소비가 하루 평균 120만 배럴씩 늘어나는데 올해는 180만 배럴씩 늘어났기 때문에 저유가로 인해 늘어난 수요가 60만 배럴이 넘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도 마찬가집니다. 과거 석탄을 주로 연료로 쓰던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석유제품 소비가 늘어 이 지역에 대한 수입이 증가했다는 겁니다. 석유 값이 계속 떨어지니 석탄을 쓰느니 기름을 쓰는 게 낫겠다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정유 업계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요가 있는 상황에서 올 초 미국 정유사들의 파업이 있었던 데다 글로벌 정유 업체는 계속 불황을 이유로 설비투자를 축소했는데 우리 정유사들은 오히려 설비를 업그레이드하거나 투자를 이어갔기 때문에 수출 여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탄탄했다는 평갑니다. 

● 정제 마진 개선

소비량이 늘어난 것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정제 마진이 개선됐다는 점입니다. 정제 마진이란 석유 제품 국제 가격과 정제 비용간 차이, 즉 정유사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을 말하는데요. 원유 가격이 급격히 하락한데 비해 앞서 언급한 수요 증가 때문에 상품값 하락 속도는 더뎠습니다. 통상 정유사가 이익을 볼 수 있는 정제 마진 손익분기 마지노선이 5달러대라고 보는데 지금 7~8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어서 업계의 수익성이 개선됐습니다.● 고급 석유제품 시장에서의 경쟁력
 
이외에도 우리나라 정유 업체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제품의 시장이 견조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엔진에 사용되는 윤활유의 원료인 윤활기유는 정유 업계 효자상품으로 중국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와 남미 지역 판매량이 매년 10~15%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급차에 쓰이는 최고급 윤활기유 부문에서 우리나라 업체들이 독보적인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유가=정유사 실적악화’ 같은 과거의 당연한 공식이 올해는 깨졌습니다. 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복잡해지고 워낙 여러 변수들이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런 모습은 앞으로 더 자주 여러 분야에서 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안심할 수 만은 없습니다. 정유사들도 ‘알래스카의 여름’이란 표현을 쓰면서 반짝 호황을 경계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며 표정 관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특히 국제유가가 내년 상반기 더 내려가 두바이유가 20달러대에 진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는 만큼 불확실성에 대비한 전략 마련에 힘써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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