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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시대를 뚫고 나온 '송곳'…故 전태일

김주영

입력 : 2015.11.15 16:12|수정 : 2015.11.15 16:12




지금,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먼지구덩이 골방에서 14시간 동안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등골이 휘도록 일하고도 커피 한잔 값에 불과한 일당을 받고 차비를 아끼려고 집까지 2시간을 걸어온,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풀빵 한 두 개뿐인 사람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당신은 노동의 현실과 노조의 역할을 교과서나 뉴스가 아닌 최규석 원작의 웹툰 <송곳>에서 처음 배웠을 수도 있고

올해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고작 올랐다는 게 시간 당 평균 6,351원씩 오르는 전셋값을 따라잡지 못하는 쥐꼬리 수준이라는 걸 혜리의 CF를 보고서야 알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노동자의 기본 권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45년 전,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분신한 스물 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름 뒤에 늘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전태일이지만, 그의 삶은 서러움과 좌절뿐이었습니다. 노숙과 동냥을 거듭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초등학교 마저 중퇴한 그는 어린 나이에 온갖 행상을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갔습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의 끈이 끊겨버린 뒤 가출을 하기도 여러 번.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재봉일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들이 공부 가지고 성공하는 줄 알아? 돈 가지고 하는 거야, 돈!"

그러나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가난은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그는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재단보조)’로 취직했습니다. 하숙비를 내기도 빠듯했던 탓에 일이 끝나면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된 밥벌이를 밤낮으로 더 했습니다.

전국에 팔려 나가는 옷의 70% 정도가 평화시장에서 만들어졌지만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가혹했습니다. 하루 14~16시간씩 닭장 같은 다락방에서 피땀 흘린 대가는 밥값도 안 되는 박봉과 온갖 직업병이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작업장에서 폐병을 얻은 여공이 해고되는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작업장 환경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여기저기 묻던 중 근로기준법을 알게 됐습니다.

그동안 사장의 위법에 찍소리도 못하고 하라는 대로 참고 살아온 자신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바보였다고 생각한 그는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었습니다.

부당한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법을 공부하기 위해 빚을 내어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샀지만 그에게 법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 그는 이때부터 자조섞인 이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공부했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업주들에게 위험분자로 찍혀 해고당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평화시장 근로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해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을 냈지만 돌아오는 건 조롱과 냉소뿐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성장은 땀 흘려 일하는 산업전사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말하면서도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 1969년 겨울 일기 중 -

바보회가 해체되고 막노동을 하던 그는 1970년 9월, 평화시장에 다시 나타나 삼동친목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무렵 노동청에서 우연히 만난 출입기자는 그에게 본격적인 실태조사를 권했고 이 조사자료를 근거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낸 바로 다음 날,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고발한 최초의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공권력을 투입해 그들을 회유하고 압박했습니다. 결국 그는 목숨을 건 저항을 결심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국가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현실과 사회가 외면해 온 노동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근로기준법’을 불태우며 노동자들의 불꽃이 된 그가 남긴 세 가지 유언.
“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에게 개발과 성장의 혜택과 보상을 약속했지만 10년 세월이 흘러도 1980년대 경제 호황에도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됐어도...그 약속은 지금 얼마나 지켜졌을까요.

고용 안정, 근속년수, 임금 불평등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입니다. 경제 얘기만 나오면 ‘노조탓’하는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인10.3%. 전체 노동자의 열에 아홉은 부당 해고에 힘껏 맞설 수도 없습니다.
(“노조가입률은 10%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에 끼치는 패악이 엄청나다. 노조가 불법파업을 일삼고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었을 것” - 9월 2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쓴 편지 -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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