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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무대에 올려진 '만추'

곽상은 기자

입력 : 2015.10.18 14:47|수정 : 2015.10.20 11:15


연극 '만추'영화 ‘만추’가 연극으로 돌아왔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이 많지만, 젊은 세대 가운데 이 영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빈과 탕웨이 주연의 영화, 아니 그보다는 탕웨이와 김태용 감독의 영화로 더 잘 알려진, 그래서 영화를 보지는 않았어도 다들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다는 영화 ‘만추’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원작은 2011년 김태용 감독의 동명 영화로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무려 3차례나 더 리메이크 되기도 했습니다. 75년과 81년 김기영 감독 연출의 ‘육체의 약속’과 김수용 감독 연출의 ‘만추’로 각각 리메이크 됐고, 이보다 앞선 72년에는 사이토 고이치라는 일본 감독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TV문학관 같은 방송 단막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분명 제작자들의 마음을 잡아 끄는 힘이 있는 스토리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처음 본 ‘만추’는 김태용 감독의 2011년작입니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으니 벌써 4년 전입니다. 잔뜩 흐린 시애틀을 배경으로 두 남녀 간의 격정적인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지는 영화였습니다. 남편을 살해하고 복역 중이던 중국계 이민 가정 출신의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흘 동안의 특별휴가를 받습니다.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한국 청년 ‘훈’을 만나게 되고 이후 사흘 간의 이야기가 스크린에 펼쳐집니다. 안개와 낙엽 진 거리의 풍경이 너무나 강렬해, 영화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회색과 담갈색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펼쳐집니다. 탕웨이의 연기도, 현빈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후 TV에서 김수용 감독의 1981년작 ‘만추’도 보게 됐는데, 탕웨이와 현빈의 역할은 각각 김혜자, 정동환 배우가 맡았습니다. 김태용 감독의 각색을 거치지 않은 81년작 ‘만추’는 이만희 감독의 66년 원작에 훨씬 더 충실합니다. 우선 배경이 미국이 아닌 한국입니다. 남편 살인죄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혜림’이 3일간의 휴가를 받아 어머니의 산소로 향하던 도중 열차에서 우연히 위조지폐범인 청년 ‘민기’를 만나게 되는 내용입니다.
 
김수용 감독의 영화에는 아무 대사 없이 이어지는 긴 침묵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사이 카메라는 배우들의 표정을 집요하게 담아냅니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소리에는 빈 공간이 많고, 이런 분위기는 둘이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민자 혹은 체류자)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한층 강화되고 두드러져 보여집니다.
 연극 '만추'연극 ‘만추’는 이 가운데 김태용 감독의 2011년작의 줄거리를 선택해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겼습니다. 단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 ‘언어’를 빼면 말입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연극 속 두 주인공은 한국말을 씁니다.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애나’가 그녀의 가족들과 대화할 때는 중국말이 사용되는데, 제작진은 각각의 배우들이 자신의 환경에 맞는 언어를 쓰되 미국 내 공용어에 해당하는 영어가 사용되는 상황에선 한국어로 대체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에 비해 외국어가 사용됐을 때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훨씬 더 심리적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는 연극의 특성을 고려했다는 건데, 고육지책을 택하기까지 제작진의 고민이 느껴졌습니다.
 연극 '만추'언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영화를 그대로 재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작품입니다. 무대 위 남녀 주인공은 현빈과 탕웨이의 캐릭터는 물론 의상과 머리모양까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잔뜩 흐린 시애틀의 거리는 철골 구조 세트의 뒤편으로 보이는 뿌연 스크린에 담았습니다. 인상적인 장면, 중요한 대사는 토씨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원형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되풀이됩니다. 두 주인공은 극단적인 상황과 사연을 지닌 캐릭터임에도,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대 위 배우들도 직관적인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섬세하고 성실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여기에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이 애잔함을 더합니다.
 연극 '만추'김수용 감독의 ‘만추’와 김태용 감독의 ‘만추’ 사이 간극이 보여주는, 정교하고 감각적인 리메이크의 매력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무대입니다. 제작진 스스로도 애초부터 '원작을 뛰어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창조적인 재해석보다는 성실한 재연에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영화 ‘만추’를 이전에 본 적 없는 분들은 물론 영화를 이미 접한 분들에게도 역시나 ‘만추’의 이야기, 그 자체의 매력은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수많은 리메이크를 만들어낸 그 쓸쓸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진 힘만은 스크린 안에서도 무대 위에서도 변함없이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