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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던 해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입니다. 어빈 웰시의 소설을 영화화한 건데, 마약에 중독된 스코틀랜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당시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영화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인물들의 몽환적인 의식세계를 시각화한 감독의 독창적인 스타일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로베르 르빠주 연출의 연극 ‘바늘과 아편(Needles and Opium)’이 사흘간의 짧은 일정으로 국내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로베르 르빠주는 무대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큐브’를 이용해 다양한 ‘극의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그 장면들이 시각적으로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로워 ‘무대 위의 마술사’로 불리는 르빠주의 명성을 거듭 확인시켜줍니다.

극에는 모두 3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20세기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던 시인이자 극작가 겸 영화감독인 장 콕토, 그리고 20세기 재즈의 역사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출신 트럼펫 연주가 마일즈 데이비스가 실존 스토리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둘은 프랑스와 미국, 백인과 흑인, 스토리텔러와 음악가라는 다양한 이질적 특성을 보여주지만, 사랑을 잃고 마약에 빠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현재의 인물이자 허구의 캐릭터인 캐나다 출신 배우 로베르가 더해집니다. (극 연출가의 이름이 로베르 르빠주. 그렇습니다. 로베르는 연출가가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시킨 캐릭터로, 이 작품이 초연된 1991년에는 르빠주처럼 30대 남성으로 그려졌지만, 2013년 다시 만들어진 버전에서는 50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자존감이 부족하고 남의 말에 좌지우지 되는 심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극 중에서는 실연의 고통에 허덕이다 최면치료를 받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무대 ‘큐브’는 한 변의 길이가 2미터 남짓한 정육면체를 비스듬히 잘라놓은 듯한 모습으로,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천천히 회전하며 세 인물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몽환적으로 표현해냅니다. 실제로는 비좁고 제한된 공간에 불과하지만, 연출가의 독창적인 상상력과 정교한 테크놀로지가 더해지면서 그 공간은 무한한 확장을 거듭합니다.
그 작은 공간은 다양한 호텔방과 사무실로 변신하더니 뉴욕과 파리의 뒷골목을 거쳐 급기야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작은 우주를 품습니다. 더 나아가 한 인물의 의식세계, 마약에 취한 환각의 세계까지 담아냅니다. 로베르가 현실의 공간을 부유하다가 회전하는 몽환적 배경을 뚫고 사라지는 장면은, 트레인스포팅에서 마크가 화장실 변기를 통해 깊은 물속으로 표현된 의식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연상될 만큼 참신한 연출이었습니다.
르빠주는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걸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데, 그 작업을 독창적이면서도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수준으로 완성해낸다는 점에서 뛰어난 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뛰어난 시각적 효과 속에서도 그가 전하는 스토리와 그 안의 등장인물들이 여전히 압도당하지 않은 채 본연의 매력을 유지한다는 점은 연출가로서 르빠주의 또다른 미덕이라 할 만 합니다. 극중 인물들의 상실과 고독, 중독과 불안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로베르 르빠주에게 이 작품의 영감을 준 인물이자 극중 인물이기도 한 장 콕토는 이런 말을 합니다. ‘왜 미국 영화에서는 상상력이 늘 꿈의 결과물이어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등장인물이 영화 초반에 잠들어서 영화가 끝날 때쯤 깨어나는 구성에서만, 영화감독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의 예술가들에게는 실험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바늘과 아편’은 르빠주가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가적 실험, 그 현재와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