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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5살 중학생보다 못한 대한빙상연맹

권종오 기자

입력 : 2015.08.11 09:16|수정 : 2015.08.19 19:40


지난 해 2월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편파 판정 논란 끝에 은메달에 그쳤을 때 일입니다. 저는 국제빙상연맹(ISU) 규정을 확인하기 위해 대한빙상경기연맹(KSU) 공식 홈페이지를 검색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규정집이 당연히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영어로 된 원문만 존재했을 뿐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그 이후에 대한빙상경기연맹은 한국어로 된 ISU 피겨 규정집을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졸속으로 번역한 탓인지 몰라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영어 원문에 있는 목차는 아예 없고 <규정 600>이하 아이스댄스에 관련된 부분도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영어 원문 규정집 전체를 충실하게 번역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14년 6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제55차 ISU 총회가 열렸습니다. 김재열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등 우리 측 고위관계자도 참석했습니다. 이 총회에서 피겨스케이팅 규칙이 크게 강화됐습니다. 예를 들어 플립이나 러츠 점프에서 잘못된 에지, 즉 롱에지를 범하면 회전수가 부족할 때와 마찬가지로 기본점수의 70% 밖에 받지 못합니다. 만약 롱에지와 회전수 부족을 동시에 저지르면 50%나 감점하게 했습니다. 1회전 반 이하의 점프에 대해서는 아예 점수를 주지 않고 스핀 규정도 훨씬 까다롭게 했습니다.국제빙상연맹이 확정한 새로운 피겨 규정은 지난해 9월16일 ISU 홈페이지에 공식 게재됐습니다. 그런데 어제(10일) 오전까지도 대한빙상경기연맹 홈페이지에는 2010년 ISU 규정집과 한국어 번역문이 여전히 그대로 게재돼 있었습니다. 규정이 바뀐 지 1년 가까이 됐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피겨여왕’ 김연아를 배출한 국가의 빙상연맹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 중학교 3학년생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용인의 문정중학교에 다니는 김서연 학생입니다. 어려서부터 영국과 미국에 살면서 피겨스케이팅을 접한 김 양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국내 영자 신문 주니어기자로 활동하며 김연아 선수를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김 양은 빼어난 영어 실력과 피겨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난 해 말부터 새로 바뀐 피겨 규정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정중학교 영어 번역 동아리 ‘아이스홀릭’(ICE HOLIC)에 소속된 강민지, 유재희, 황경윤 3명의 학생이 이 작업에 동참했습니다.이들 중학교 3학년생 4명은 2014년부터 새롭게 바뀐 ISU 싱글, 페어 스케이팅, 아이스댄스 세 개 분야의 특별규정과 기술규정을 번역했는데 분량은 영문 원문을 포함해 140여 쪽에 이릅니다. 주2회 방과 후 모임과 블로그 활동을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눴고 함께 경기 관람도 하면서 한국어 번역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기술적인 용어, 전문 용어 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SBS 방상아 해설위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동아리 리더(회장)인 김서연 양은 “우리나라가 정말 피겨스케이팅의 진정한 강국이 되기 위해선 우리가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꼭 ISU 국제심판이 되어서 우리나라 피겨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이번 동아리 활동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ISU 규정집 번역을 매번 업그레이드 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다가올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할 우리나라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합니다. 소치 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친 김연아 언니 같은 경우가 다시는 나오면 안 되잖아요?” 라며 당찬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들은 조만간 새로 번역한 피겨 규정집을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무료로 전달하고 또 직접 출간해 국회 도서관 및 국공립 도서관에도 역시 무료로 기증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성껏 만든 번역문이 대한빙상경기연맹 홈페이지에 그대로 게재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빙상연맹 관계자는 “아직까지 중학생들이 번역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ISU 규정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은 우리 경기인들이 할 일이다”며 중학생들이 번역문을 준다 해도 그대로 게재할 뜻이 별로 없음을 나타냈습니다.

중학생들의 번역문을 수용하든 안 하든 국제 피겨 규정이 바뀐 지 1년이 됐는데도 번역문은 물론 영어 원문조차도 2010년 것을 공식 홈페이지에 그대로 게재한 것은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한심 행정의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어제(10일) 오전 10시30분쯤 제가 이 사실을 대한빙상경기연맹 피겨 담당자에게 지적하자 오후에 갑자기 홈페이지를 변경하는 '꼼수'까지 부렸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어제 오전의 홈페이지 모습이고 두 번째 사진은 제가 전화를 해 문제점을 알린 뒤에 빙상연맹이 급히 바꾼 홈페이지입니다. 영어로 된 ISU 피겨 규정은 2014년 것으로 재빨리 바꿨지만 이에 맞는 한국어 번역문은 2010년 것 외에 새로 해놓은 것이 없었기에 변경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사진을 보면 아예 한국어로 번역된 규정을 볼 수 있는 버튼을 삭제해버렸습니다. 대한빙상연맹은 치부를 가리기에 급급한 행태를 버리고 뼈저린 자기 성찰부터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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