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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모딜리아니는 왜 목이 긴 여인들을 그렸나?

김영아 기자

입력 : 2015.07.26 09:05|수정 : 2015.07.27 14:12


여기, 서로 다른 여인을 그린 두 점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 모드 아브랑트의 초상 (1908년, 헥트 미술관 )
▲ 앉아 있는 잔느 에뷔테른느 (1918년, 이스라엘미술관)

한 눈에 봐도 전혀 다른 화풍의 두 그림은 놀랍게도 같은 작가의 작품입니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1908년 그린 '모드 아브랑트', 두 번째는 같은 작가의 1918년 작품인 '앉아 있는 잔느 에뷔테른느'입니다.

첫 번째 그림의 주인공 모드는 모딜리아니가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에 정착한 뒤 처음 만난 '첫 번째 연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의 주인공 잔느는 서른다섯 살로 요절한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이었습니다. 모드는 모딜리아니에게 배신의 상처를 안긴 뒤 냉정하게 떠났고, 잔느는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사망한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연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두 작품 가운데 우리에게 친숙한 '모딜리아니스러운' 그림은 역시 두 번째 작품입니다. 기형적으로 긴 목과 길게 과장된 코, 둥글게 처진 어깨, 눈동자 없이 텅 빈 아몬드 형 눈.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살짝 기울어진 머리.
▲  앉아 있는 갈색 머리의 어린 소녀 (1918년, 피카소미술관)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여인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노천명 '사슴'

인체의 비례가 완전히 무너지고, 어찌 보면 다소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모딜리아니스러운' 특징들은 글로 써 놓고 보면 무척 비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실제 그림으로 만나면 모딜리아니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참 아름답습니다.

미인대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뭐랄까,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먹먹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입술을 꼭 다물고 관람객을 쳐다보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비운의 천재화가'로 불리는 작가의 삶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일 겁니다.
▲ 모딜리아니

188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스물두 살부터 파리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파리는 샤갈, 피카소, 브랑쿠시, 키슬링, 수틴, 반 동겐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집합지였습니다. 한마디로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의 본산지였습니다.

'전위'라는 뜻의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 등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을 말합니다. 기존 예술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술계의 혁명인 셈입니다.

당대의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지만,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좀 특별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동참해 새로움과 파격을 추구하는 대신 가장 전통적인 장르인 인물화만 고집한 탓입니다. 모딜리아니는 35년 짧은 생애 동안 400점에 채 못 미치는 회화를 남겼는데, 풍경화 5점을 빼고는 모두 인물화입니다.

● 모딜리아니는 왜 목이 긴 여인들을 그렸나?

서두에 소개한 모드 아브랑트의 초상에서 드러나듯, 모딜리아니의 인물들이 처음부터 목이 길었던 건 아닙니다. 초기 작품 속 인물들은 매우 '정상적'이고 '사실적'인 비례를 보여줍니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입니다.
▲ 폴 알렉상드르의 초상 (1909년, 도쿄 후지미술관)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인물들의 목이 길어지기 시작한 건 191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모딜리아니의 화풍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이유는 일생 동안 모딜리아니를 따라다니던 가난이었습니다.

1906년 파리에 정착한 모딜리아니는 1914년까지 단 한 점도 작품을 팔지 못 했습니다. 후원자인 알렉상드르 박사가 의뢰하는 작품을 그려주고 생활비를 지원받는 게 유일한 소득이었습니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1910년 화가로서의 성공에 불안을 느끼고 조각가로 전업을 시도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대 에투르스크 조각과 아프리카 원시조각, 크메르 조각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참고: 아프리카 원시조각
https://www.arianagallery.com/photos/sculpture/african-art/african-art_fertility-doll.html
▶ https://articles.latimes.com/2013/apr/15/entertainment/la-et-cm-lacma-acquisitions-20130416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세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 병약했던 모딜리아니에게 조각은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시작한 지 4년여 만에 다시 회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목이 길고 텅 빈 아몬드 눈을 가진, 아프리카 조각상을 그대로 닮은 인물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합니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모딜리아니만의 독특한 인물들은 결국 지독한 가난과 불확실한 미래, 병약한 육체 때문에 고통받던 모딜리아니의 비극적 삶이 응축된 산물입니다. 그러니 저 그림 속 인물들이 보는 이들의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 여인의 초상(1918년, 맨체스터 시립갤러리)
▲ 마누엘 윔베르 에스테베의 초상 (1916년, 빅토리아국립미술관)

●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것"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은 목이 긴 초상이지만, 전문가들은 모딜리아니의 최고 걸작으로 초상화보다 누드화를 꼽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 생전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들은 걸작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머리를 푼 채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 (1917년, 오사카 시립 근대미술관)

모딜리아니는 1917년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파리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어서, 사망하기 3년 전에 맞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전면에 전시된 누드화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으면서 전시도 일찍 문을 닫게 됩니다. 생애 처음이었던 이 전시는 모딜리아니 일생의 마지막 전시가 됐습니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끝까지 철저한 '무명화가'로 살다가 1920년 결핵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말입니다. 현재 모딜리아니는 작품 한 점에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화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많은 '비운의 천재'들이 그랬듯이,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늘 천재를 잃어버린 뒤에야 그들의 재능을 알아봅니다. 눈은 있지만 눈동자가 없는 건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인물들 만이 아니라 우리들일지도 모릅니다.

※전시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 / 10월 4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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