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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라도 한 것 처럼…아베 반둥연설 영문판 교묘한 단어 선택

입력 : 2015.04.24 10:59|수정 : 2015.04.24 10:59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최근 반둥회의에서 일본어로 연설할 때 사죄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연설의 영문판에는 이를 연상시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아베 총리는 22일(현지시간)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일본어로 연설할 때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총리관저 측이 공개한 이 연설의 영문판에는 "deep remorse"로 번역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번역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아베 총리가 역사수정주의 노선을 취한다는 의혹을 벗으려는 의도가 깔렸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영일(英日)사전은 "remorse"를 깊은 후회, 회한, 자책하는 마음, 양심의 비난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성"(反省)을 일영(日英)사전에서 찾아보면 soul-searching, reflection, reconsideration 등으로 나온다.

참고로 영한사전은 "remorse"를 후회, 양심의 가책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제반 상황을 고려하면 깊은 반성을 "deep remorse"라고 번역한 것은 누구나 택할만한 자연스러운 번역은 아닌 셈이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깊은 반성"을 언급했으나 깊은 반성의 결과 일본의 잘못을 인정한다거나 사죄한다는 인식을 표명하지 않았다.

반성의 사전적 의미가 잘못이 있었는지(옳고 그름)를 확인하고자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베 총리의 연설에 등장하는 "반성"은 사죄나 잘못의 인정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remorse"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를 적확하게 전달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전제를 인정한다면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사죄하지 않았음에도 영문판은 마치 사죄하거나 잘못을 인정한다는 인상을 주도록 번역된 것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1995년 발표된 무라야마(村山)담화의 영문판이 통절한 반성을 "deep remorse"로 표현한 것이 이런 번역의 근거가 됐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타국 국민에 가한 피해에 관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나타낸다고 하고 있다.

맥락상 여기 등장하는 반성은 용서를 구한다는 의사 표명으로 이어지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나 자책이 전제된 셈이고 "remorse"로 표현하는 것이 무리한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침략"이라는 표현도 썼으나 일본이 타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무라야마(村山)담화와는 맥락이 달랐다.

아베 총리는 "침략 또는 침략의 위협, 무력행사에 의해 타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 "국제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한다"는 1955년 반둥회의 원칙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침략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리고 "반둥에서 확인된 이 원칙을, 일본은 앞선 대전(大戰)의 깊은 반성과 함께 어떤 경우에도 지키는 국가일 것을 맹세했다"고 과거 일본의 행위를 소개했다.

이에 반해 무라야마담화가 일본이 "식민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 국가에 피해를 준 것에 관해 "통절한 반성"을 표명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아베 총리가 "침략의 정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고 언급해 역사 인식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후 그가 "침략"을 인정하는지가 관심을 끈 점을 고려하면 침략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반둥회의 원칙을 인용한 것은 그가 과거 일본의 침략행위를 인정한 듯한 혼동 노린 것이라는 억측을 낳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요미우리(讀賣)신문신문은 아베 총리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학자가 1955년 반둥회의의 평화 10원칙 중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고 반성을 얘기하려면 영어로 "deep remorse"를 선택하도록 제언했다고 24일 보도했다.

비슷한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어로 "진신바이바이(인신매매·人身買賣)"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WP기사에는 "휴먼 트래피킹(human trafficking)"으로 표현됐다.

이에 관해 당시 요미우리신문은 "진신바이바이"라는 일본어는 부모나 민간업자에 의한 매매를 연상시키기므로 일본군이 직접 여성들을 강제연행한 것과 같이 "좁은 의미의 강제성"과는 다른 느낌이 있지만, 영어의 "휴먼 트래피킹"은 강제연행도 포함하는 용어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공식 견해에 사용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때문에 아베 총리는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자신의 생각을 (일본어로) 유지하면서도 마치 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미국 정부와 같은 인식을 취하는 듯한 인상을 노렸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이달 29일 예정된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는 영어로 연설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때는 아베 총리의 발언을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번역에서 미세한 차이가 드러날지 주목된다.

산케이신문은 아베 총리가 이날 연설에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1957년 6월 미국 하원에서 한 연설 내용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고 일본 외무성 관계자의 전망을 보도했다.

한때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용의자였다가 나중에 총리가 된 기시 노부스케의 당시 연설에 "침략", "식민지 지배", "반성" 등의 표현은 들어 있지 않다고 산케이는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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