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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차이나타운', 스타일리시한 여자 느와르의 탄생

김지혜 기자

입력 : 2015.04.21 14:37|수정 : 2015.04.21 14:37


느와르 장르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장르의 고전으로 꼽히는 '대부', '좋은 친구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은 남성 중심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의 판타지 혹은 성공 괘도에 오른 남자 캐릭터의 장식적 존재에 그쳤다. 

하물며 충무로 느와르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두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고 가는 영화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 제작 플룩스 픽쳐스)은 돌연변이에 가깝다. 

'일영'(김고은)인 태어나자마자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졌다. 어린 일영은 캐리어에 담겨 동인천의 차이나타운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엄마'(김혜수)라 불리는 여자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의 대모로 군림하고 있는 엄마는 필요에 의해 아이들을 하나둘씩 거둬들이고 일가를 형성해나간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는 잔인한 엄마지만, 일영에게는 그녀가 유일하게 집이다. 일영은 엄마의 세계 안에서 없어서는 안될 아이로 자란다. 
이미지어느 날 일영은 엄마의 돈을 빌려 간 악성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을 만난다. 그는 엄마와는 전혀 다른 따뜻하고 친절한 세상을 보여준다. 일영은 처음으로 차이나타운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해진다. 이런 변화를 감지한 엄마는 일영에게 위험천만한 일을 주고 존재 이유를 증명해보라고 한다.  

영화에서 먼저 시선을 끄는 건 마가흥업이라는 공간이다. 외형은 낡은 사진관이지만 내부에서는 고리의 이자를 담보로 한 돈이 오고 가고, 채무 대신 장기가 돈처럼 거래되는 살벌한 곳이다. 엄마와 그녀의 수하에 있는 일영, 우곤(엄태구), 쏭(이수경), 홍주(조현철)는 이곳은 툇줄 삼아 살아간다. 

유사 가족처럼 보이지만, 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다. 엄마와 식구 사이에는 생존법칙이 존재한다. 생존의 전제는 쓸모이며, 쓸모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증명은 필수다. 일영을 비롯한 네 인물은 생존을 위해 각자 방식대로 고군분투를 하며 자라왔다.

이들에게 있어 삶은 라이브(live)가 아닌 서바이브(survive)의 대상이다. 사는 것이 아닌 살아남는 것, 필요가 아닌 쓸모, 인정이 아닌 증명, 같은 듯하면서 사뭇 다른 뜻의 단어를 쓰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삶의 방식과 가치관은 보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미지엄마라는 불리는 여자는 전혀 엄마답지 못한 인물이다. 아이들에게 돈을 걷어오라고 시키고, 그것이 녹록지 않을 경우 '수술'을 하라고 지시한다. 엄마의 말은 곧 법이다. 일영의 갑작스러운 일탈은 이 세계의 균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마가흥업에 모인 이들이 어떤 의미에선 모두 이방인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누구의 자식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버림받았거나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정도의 암시만 있을 뿐이다. 잔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인간 군상을 영화를 디테일하게 그려낸다. 

감독은 이야기를 애써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연출 방식을 택했다. 인물의 전사(前事)를 최소화하고 사건의 제시를 통해 캐릭터를 부각한다. 이는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몰입력을 높인다. 

앞뒤, 유기적으로 짠 에피소드와 대사는 후에 일어날 일의 복선으로 작용하며 이야기의 완결성을 높인다. 대사의 경우 주어와 술어의 어순을 바꿔 멋스러움을 더했다. 일상적이지 않는 문장이지만 개성 뚜렷한 캐릭터의 입으로 전해져 장면 장면의 여운을 더한다.

또 부감샷과 클로즈업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영상은 영화의 스타일시리함을 부각시키고, 녹색과 빨강 등 원색을 부각한 미술은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을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이미지연출은 맡은 한준희 감독을 눈여겨보기를 권한다. 영화 '사이코메트리'(2013)의 각본가로 충무로에 발을 디딘 한준희 감독은 단편 '시나리오 가이드'와 '담배를 물다'를 거쳐 '차이나타운'으로 장편 데뷔했다. 올해 32살인 젊은 감독은 '코인코커걸'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차이나타운'으로 확장해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크린에 맘껏 펼쳤다. 

신인 감독이 장르 영화가 클리셰에 갇히거나 뒷심부족으로 작품을 망치는 경우는 많았다. '차이나타운'은 초중반까지 '대부'의 정서에 '아저씨'의 스토리텔링을 입힌 영화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중반 이후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 힘있게 몰아부친다. 단 한번의 로맨스가 아닌 복수극에 방점을 찍어 하드 보일드한 느와르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 여성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차이나타운'이 전에 없던 느와르 영화로 불릴 수 있는 이유다. 영화 속 여성은 여타 장르 영화에서 그려진 캐릭터와는 조금 다르다.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뒷골목에서 자라나고 길들여진 일영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듯한 제3의 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준희 감독은 엄마와 일영의 묘사에 대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강한 것 같다. 여자들은 결정적인 순간과 중요한 순간에 변명도 하지 않고 더 강력한 결정을 내린다"며 자신의 해석을 전했다. 

그의 말을 부연한다면 이 영화는 남자들보다 더 강한, 성별의 한계를 초탈한, 무성화된 여성이 등장하는 느와르 영화라 할 수도 있겠다. 
이미지배우들은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물샐틈없는 열연을 펼쳤다. 이미지에 걸맞은 타입 캐스팅과 신선한 얼굴을 기용한 의외의 캐스팅이 조화를 이뤘다. 

'엄마'역의 김혜수는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파격 변신이다. 특수분장으로 살집을 붙이고, 머리를 하얗게 염색한 외형적 변화뿐만 아니라 기형적 모성을 표현하고 연기해낸 캐릭터 분석력도 돋보인다. 특히 핵심적 대사와 단촐한 표정만으로 여자 보스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점은 인상적이다.

김고은 역시 김혜수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영악함과 순수함이 공존하는 얼굴에서 나오는 다채로운 이미지,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동물적 본능이 낳은 연기는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이외에도 엄태구, 고경표, 조현철, 이수경, 조복래, 김수안 등의 주요 배우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강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차이나타운'은 오는 5월 13일 열리는 제68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됐다. 오랜만에 등장한 패기 넘치는 신인감독과 각 세대를 대표하는 두 여배우의 근사한 앙상블에 대한 알맞은 보상이 아닐까 싶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110분, 개봉 4월 29일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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