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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이 끔찍함을 알려야 한다"

입력 : 2015.02.26 14:48|수정 : 2015.02.26 14:48


1919년 기미년 4월 15일 이른 오후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두렁바위'로 불리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농촌마을이었던 제암리에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들이닥쳤다.

4월 5일 화성주민들의 발안장날 만세운동을 강경 진압한 것을 사과하겠다면서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대부분 기독교와 천도교 주민들이었다.

이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 군경들은 교회를 포위하고 창문으로 주민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주민들이 죽거나 부상으로 신음하자 일본군은 만행을 감추려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몇 명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사살됐고, 교회 밖으로 도망치다 사살된 시신 6구도 발견됐다.

남편 생사를 알려고 달려온 마흔 넘은 여인은 사살되고, 19세 여인은 칼에 찔려 죽었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이렇게 교회에서 죽은 사람 23명을 포함해 무고한 양민 29명이 학살당했다.

"나는 이 끔찍한 사건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한국에 선교사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있던 캐나다인 의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한국명 석호필) 박사.

스코필드 박사는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소식을 듣고 사흘만인 4월 18일 현장을 찾아와 일제의 만행의 흔적을 몰래 사진으로 찍고 주민들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들었다.

그는 사진과 자신의 증언을 담은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캐나다 선교본부에 제출하고 장로회 기관지인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에 기고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했다.

1920년 일본의 압력으로 캐나다로 강제 출국된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진실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소외된 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하다가 1970년 4월 12일 82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자신이 그토록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한 일제 만행의 장소인 제암리교회에 95년만에 다시 선다.

그의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돼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공원에 설치된 것이다.

화성시는 3억5천만원을 들여 기념관 공원에 스코필드 박사 청동 동상을 제작, 오는 3·1절 기념식때 제막식을 연다.

스코필드 박사는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양손에 카메라를 들고 제암리 교회가 있던 터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상 뒤로는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과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을 설명하는 벽면이 설치됐다.

동상에서 5m가량 떨어진 곳에는 스코필드 박사의 손녀인 리사 크로퍼드(Lisa Schofield Crawford)씨가 보내온 캐나다의 상징 단풍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할아버지 동상 제막식에 초청된 크로퍼드 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해주고 동상까지 건립해 준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2011년부터 스코필드 박사 재조명 운동을 벌여온 화성시는 동상 뿐 아니라 스코필드 박사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도 제작했다.

채인석 화성시장은 "3·1 운동과 일본의 조선인 학살을 국제 사회에 고발한 스코필드 박사에 대해 국내에서 오히려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면서 "스코필드 박사 동상 건립을 통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제암리를 독립운동의 성지로 부각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이 세워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는 해마다 1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기념관이 건립된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방문객은 120만6천명에 달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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