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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이번 설에는 오지 마라"

입력 : 2015.02.15 14:01|수정 : 2015.02.15 14:01


"자식들한테 여름휴가 때나 오라고 했어. 고맙게도 자식들이 더 잘 알고 있더라고…."

국내 최대 축산단지로 꼽히는 충남 홍성에서 돼지 2천500마리를 키우는 박영규(61)씨에게 올 설은 없다.

예년 같으면 고향을 찾은 친지·가족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며 시끌벅적하게 보내겠지만, 올해는 구제역이 모든 것을 갈라놓았다.

박씨는 최근 타지에 사는 두 딸에게 전화해 "이번 설에는 집에 오지 말라"며 "여름휴가 때 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구제역을 피하기 위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마음인데 설은 무슨 설이냐"고 혀를 찼다.

구제역이 휩쓸고 간 지난 2011년의 악몽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당시 홍성에서는 127개 농가에서 돼지 5만3천여 마리를 살처분했다.

피해액이 107억6천만원에 달했다.

이렇다 보니 조금이라도 주의를 소홀히 했다가는 어떤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다.

박씨는 "우리 집 돼지 때문에 다른 집 돼지가 (구제역에) 걸렸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이럴 때는 외부하고 인연을 딱 끊고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종시 전의면에서 돼지 2천여마리를 사육하는 강일권(65)씨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너무 보고 싶지만, 구제역이 사라지고 나서 만나기로 했다"며 "올 세배는 영상통화로 대신할 예정"이라며 씁쓸해했다.

강씨는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행복하던 설을 올해는 함께 사는 아들과 조촐하게 보낼 참이다.

충남 홍성군과 세종시 등 구제역이 발생한 지역의 주민들은 코앞으로 다가온 최대 명절 설이 전혀 반갑지 않다.

즐거워야 할 설이 구제역 때문에 자식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두려운 명절로 변해 버렸다.

구제역 차단과 방역에 나선 지자체들도 설 연휴 때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홍성군은 최근 대규모 행사, 축산 관련 단체 모임 및 각종 기념식 등은 구제역 전파를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될 수 있으니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읍·면사무소와 단체에 발송했다.

또 양돈·축산농가는 물론 일반 주민들에게도 명절 고향 방문 자제를 당부하는 한편 '고향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 대신 '모임을 자제하고 조용하게 설을 보내자'는 내용의 현수막을 게시할 계획이다.

세종시도 명절기간 축산농가 방문을 금지하는 한편 농민들에게는 모임 참석 자제를 당부하고 나섰다.

역과 터미널, 전통시장에는 발판 소독조를 설치하고, 거점소독소와 통제소를 추가로 설치해 방역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시골에 사는 부모가 자녀를 만나러 도시로 가는 역귀성도 '금기사항'이 됐다.

명절 때마다 서울로 손자를 보러 갔던 김모(72·홍성군 은하면) 할머니는 "움직이는 것 자체가 동네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올 설에는 조용히 집에서 혼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제역으로 명절이 명절 같지 않다는 강일권씨는 "하루하루가 정말 어렵다"며 "너무 힘들어 축산을 계속해서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며 답답해했다.

강씨는 "그래도 어쩌겠어. 곧 좋아지겠지…"라며 말문을 닫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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