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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만리서 돌아온 父 유골은 2구…씁쓸한 광복70년

입력 : 2015.01.05 08:17|수정 : 2015.01.05 08:17


올해 우리나라가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김문영(73.여)씨에게는 여전히 '온전한 광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김 씨의 비극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는 약 40년 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 씨의 가족들은 해방 후인 1945년 가을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 선산에 묻었는데, 30여년이 지난 1976년 일본 정부가 '아버지의 것'이라며 또 다른 유골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분명히 한 분인데 유골은 두 구인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 따르면 김 씨의 아버지 김영환(1918∼1945)씨는 대구의 전기 회사에 다니던 1942년 일본군 해군 군무원으로 징용됐습니다.

김 씨가 태어난 지 불과 2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핏덩이를 고국에 남기고 이역만리 태국의 포로수용소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해방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말라리아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현재 대구에 거주하는 김 씨는 "아버지는 타국에서도 딸이 보고 싶다며 까만 가죽 아기 신발을 구해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한다"며 "해방 후 귀국 길에 오른 줄 알았던 아버지가 뼛가루로 도착하니 집안이 난리가 났었다고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부친에 대한 애틋한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늘 눈이 부어 있던 모친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선산에 묻고 제사까지 지낸 지 30여년이 지난 1976년 느닷없이 '두 번째 유골'이 돌아왔습니다.

앞서 받은 것은 아버지의 동료가 직접 가져온 것이었고, 두 번째 것은 일본 정부가 수습해 보낸 것이었습니다.

김 씨는 "어머니는 당시 충격으로 기절해 열흘이 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며 "깨어나고 나서도 '용서 못 할 일본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통곡을 하며 괴로워했다"고 되돌아봤습니다.

결국 '두 번째 유골'은 선산 아버지의 묘 옆 작은 가묘로 안치됐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혹은 둘 다 가짜인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집안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년 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통해 아버지가 일본 전범들과 함께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그는 2013년 7월 "합사를 철폐하라"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낸 소송에 원고로 참가했으며, 최근에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김 씨는 "아버지는 대한민국 사람이지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절대 아니다"라며 "열아홉 살 아내와 생후 2개월 된 나를 두고 끌려가 타지에서 세상을 뜬 것도 원통한데 유족에게 말 한마디 없이 전범들과 합사시킬 수 있느냐.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이 어디 있느냐"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그는 이처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풀려면 국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국가가 나서서 문제의 매듭을 푸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김 씨는 "개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려니 힘에 부친다"면서 "국가가 신경을 써 준다면 큰 힘이 실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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