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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노숙 도피' 정형근…대범했나 무모했나

입력 : 2014.12.30 17:11|수정 : 2014.12.30 17:18


'여행가방 속 할머니 시신' 사건의 피의자 정형근(55)씨는 범행 후 시신을 담은 가방을 유동 인구가 많은 인천의 한 주택가에 버리고 서울로 도주했습니다.

통상 살인범들이 인적이 드문 야산 등지에 시신을 유기한 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곳에 은신처를 마련하는 것과는 달리 정 씨는 도심 한복판에서 사실상 '노숙 도피' 행각을 벌이다가 붙잡혔습니다.

인천 남동경찰서에 따르면 정 씨는 지난 22일 밤늦게 인천에서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지난 20일 피해자 전모(71·여)씨를 살해한 뒤 21일과 22일 잇따라 전 씨의 딸이 있는 교회와 시장에 가서 동향을 살핀 직후였습니다.

정 씨는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아 실종 신고를 했다"는 전 씨 딸의 말을 듣고서 도피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정 씨가 경기도 부천과 서울 개봉동을 지나 문래동의 한 모텔까지 가는 데 10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걸어서 갔기 때문입니다.

개봉동의 한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평소 갖고 있던 아들의 체크카드로 현금 45만 원을 찾았습니다.

이 돈으로 하루 숙박료를 내고 모텔에 투숙한 정 씨는 다음날인 24일 오전 모텔에서 나와 다시 걸어서 신림동을 거쳐 관악산에 올랐습니다.

이때 경찰의 추적을 받던 자신의 휴대전화를 버렸습니다.

이날부터 이틀간 바위 밑에서 잠을 자며 몸을 숨겼습니다.

다음 날 다시 서울 남산으로 피신처를 옮겨 이틀을 보낸 정 씨는 지난 28일 인근 해방촌 등지를 배회하다가 하루 노숙을 하고 다음날 검거 장소인 을지로4가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사실상 정 씨는 도피 기간 내내 숨을 곳을 찾지 못해 야외를 전전하며 노숙을 해 온 것입니다.

평소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며 벌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 정 씨는 도피 자금이 부족해 은신처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용의자가 일부러 사람이 많은 도심으로 도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정 씨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서울로 간 게 아니라 갈 곳이 없어 발 닿는 데로 걸어가다 보니 서울로 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정 씨는 범행 이후 검거되기까지 9일간 허술한 모습도 잇따라 노출했습니다.

정 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버리고 아들 명의의 체크카드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지만 치밀함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범행 당시 입고 있던 옷은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경찰에 잡힐 때도 수배 전단지 사진과 같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습니다.

전 씨의 시신을 담은 여행용 가방도 보는 이가 많은 주택가에 버렸습니다.

가방 지퍼도 제대로 닫지 않았습니다.

해당 가방을 처음 발견한 고등학생은 "사람 엉덩이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한 게 보인다"며 112에 신고했습니다.

정씨는 경찰에서 "시신을 먼 장소에 버리려고 (가방에 넣어) 끌고 나왔는데 발각될까 겁이 났고 (시신이) 무거워 멀리 가지 못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정씨가 시신이 담긴 가방을 버린 곳은 범행을 저지른 자신의 집에서 150m가량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검거될 당시에는 정 씨 호주머니에 든 현금은 달랑 200원이었습니다.

도피 기간 내내 술을 마시며 두려움을 떨치려 했지만 결국 술을 사려고 아들 명의의 체크카드를 편의점에서 사용했다가 경찰의 통신 추적에 덜미를 잡혔습니다.

2년 전부터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사이가 가까운 지인을 흉기와 둔기로 잔인하게 살해했지만, 도주 과정은 무모할 정도로 치밀하지 못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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