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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국책 금융기관 간부들의 '부패 먹이사슬'

최우철 기자

입력 : 2014.12.27 09:32|수정 : 2014.12.27 09:33

공복(公僕)들 접대 잔치 속에 파산한 모뉴엘


영화에 비유하면 이렇다. 2014년 ‘모뉴엘’이란 가상의 작품이 있었다. 로봇청소기와 홈씨어터 PC 수출로 5년 만에 최고가 된 이야기다. 장르는 결과적으로 비극적인 드라마, 감독이자 주연배우는 박홍석 대표다. 그가 구속된 10월 말, 언론은 이 모든 게 주인공 개인의 사기극이었다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그뿐일까.

모뉴엘은 지난 9일 파산했다. 법정관리 신청 50일 만이다. 그동안 SBS 탐사보도팀은 이 파국의 드라마를 만든 주역들을 취재했다. '제작자'와 또 다른 주연배우들을 찾았다. 부패의 먹이사슬이 따로 없었다. '모뉴엘 커넥션'의 공동 주연은 국책 금융기관 간부들이었다.

지난 9일 법원은 2008년 이후 모뉴엘의 가짜 매출액이 2조 7천397억 원이라고 밝혔다. 달랑 10%만 실제 매출액이었다. 이 매출을 믿고, 기업은행과 산업은행 등 대다수 시중 은행이 3조 2천억 원을 빌려줬다. 모뉴엘은 이 중 6천700억 원을 갚지 않았다.취파_640막대한 대출이 가능했던 건 한국무역보험공사의 보증액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무역보험공사는 최근 만화 원작의 드라마 '미생'의 흥행 덕에 존재 이유가 널리 알려졌다.) 공사는 수출입실적을 확인해 은행에 대출 보증을 서준다. 이번 파산으로 보증 서준 3천256억 원을 날릴 처지이다. 1천135억 원을 신용 대출해 준 한국수출입은행도 같은 처지다.

무역보험공사의 전직 이사인 이 모 씨는 대표적인 '친모뉴엘파'였다. 지난 2일 구속됐다. 무역진흥본부장으로 일하던 2010년부터 꾸준히 뒷돈을 챙긴 혐의가 드러나고 있다. 그는 2011년 9월 퇴직했지만, 하던 일을 그만 두진 않았다. 회사 임직원들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심지어 올해 8월까지도 그는 대출 지급보증 담당 직원들을 압박했다. 그는 퇴직 후 다달이 500만 원 씩을 보내면, 이런 도움을 계속 주겠다며 박 대표에게 금품을 요구했다. 이렇게 모뉴엘 돈 1억 5천193만 원을 받아 챙겨온 사실이 드러나, 그는 구속 기소된 상태다.최우철 취파_640박 대표의 가장 중요한 접대는 밤에 주로 이뤄졌다. "거기가 싼 술집이 아니거든요." 접대 일정을 잘 아는 측근은 기가 차다는 듯 말을 꺼냈다. 서울 강남의 옛 관세청 사거리 부근. 한국무역보험공사 담당 간부를 만나는 곳은 은행 건물 지하 1층 A 유흥주점 뿐이었다. 박 대표는 공사 소속 정 모 부장과 그 동료들을 여기서 몇 차례 접대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턴 박 대표 없는 접대가 시작됐다. "그 다음부터 계속 자기네들끼리 가서 술 마시고, (박 대표) 이름 대고 계산해달라고 오라고 그랬죠."

지금 이 유흥주점은 이름만 바꾼 채로 영업 중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손님을 가장해 취재를 시도했다. 하지만, 입장조차 불가능했다. 이른바 '담당 상무'가 없으면 예약조차 못 받아 준다는 거였다. '멤버십' 즉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정 부장은 이 곳 회원이다. 무역보험공사 전 영업총괄부장. 올해 47살이다. 자녀와 아내를 미국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다. 모뉴엘 법정관리 신청 나흘 전, 그는 돌연 사표를 내고 출국했다. 그가 가족이 있는 미국에서 도피생활 중 이라고 검찰은 추정한다.최우철 취파_640그는 2009년 모뉴엘 보증 업무를 맡았다. 박 대표 측근은 정 부장만큼 집중적인 접대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술을 거기서 엄청나게 마셨어요. 많을 땐 한 달에 두세 번씩. '달아놨다'는 얘기를 자주 전해 들었어요. 또 술 마시러 간다고 계산해 달라고 박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박 대표는 직접 술집을 찾아 계산만 해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모뉴엘 자금 담당자가 주점으로 직접 송금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유흥 스폰서'나 마찬가지였다.

무역보험공사 내부 현직 부장과 퇴직 임원이 나서, 모뉴엘 보증을 책임졌다. 뇌물과 향응으로 따낸 보증서는 파국의 씨앗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중 은행의 대규모 대출이 무보의 부당 보증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은행 지점장 입장에선 모뉴엘 만큼 확실한 실적 보증수표는 없었다. 모뉴엘과 가까웠던 일부 지점장은 도리어 모뉴엘 박 대표를 관리했다.최우철 취파_640박 대표의 한 측근은 "보증 덕분에 은행과는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모뉴엘을 상대로 대출 실적을 올린 은행 지점들은 서서히 '모뉴엘 커넥션'의 한 축이 되어갔다. 심지어 지점장들은 멀리 지방 발령이 나도, 모뉴엘에 실적을 구걸했다. "옛날에 거래했던 지점장이나 부지점장들이 발령이 나서 다른 데로 가잖아요. 그럼 전화가 와요. 한번만 (대출을) 해달라고. 한 번에 100만 불만 해 줘도 실적이 쭉 올라가니까요."

무역보험공사 보증서만 있으면 끝이었다. 도리어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려 줄을 섰다. 기업은행(1천508억 원), 산업은행(1천253억 원), 외환은행(1천98억 원), 국민은행(760억 원), 농협(753억 원) 등 시중은행의 천문학적인 대출금을 끌어들이는 건 이처럼 간단했다.최우철 취파_640한국수출입은행은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 있다. 1976년 설립된 기획재정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수출입이나 해외 투자를 하는 국내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다. 모뉴엘처럼 해외 수출 기업엔 '갑 중의 갑'이다.

수출입은행 부장인 45살 서 모 씨는 2012년부터 올해 3월까지 모뉴엘 담당이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는 지난달 말 그를 구속했다. 검찰은 모뉴엘 박홍석 대표로부터 9천만 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22일, 그를 재판에 부쳤다. 이 돈은 신용 대출 한도를 늘려달라는 청탁 대가였다고 보고 있다.

수출입은행은 전폭적으로 모뉴엘을 지원해 왔다. 수출입은행은 2012년 7월 '히든 챔피언'이란 타이틀을 모뉴엘 등 7개 회사에 수여했다. 은행 측은 인증식도 열었는데, 모뉴엘 강 모 재무이사가 참석했다. 그는 6천700억 원 대 부정 대출 사건 공범으로 박홍석 대표와 함께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모뉴엘은 2011년 수출입은행 대여금이 40억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히든 챔피언으로 선정된 뒤론 매년 수백억 원 씩 대출을 받았다. 모뉴엘이 파산한 지금, 여전히 갚지 않은 돈이 1천135억 원에 달한다. 전액 신용대출이기 때문에, 100% 수출입은행의 손실이다.

서 부장은 여의도를 벗어난 곳을 좋아했다. 올해 초, 서강대교 북단에 있는 한우 식당으로 박홍석 대표를 불렀다. 여긴 150g 꽃등심 1인분에 3만 8천 원이다. 누군가를 소개해주는 자리였다. 취재팀은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박 대표의 측근을 만났다. 당시 모뉴엘과 수출입은행의 관계는 예전만 못했다고 했다. 새로 부임한 담당자는 전처럼 대출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거다. 이날 모임은 박 대표의 하소연을 들은 서 부장이 '고충'을 해결해 주는 자리였다. 서 부장은 2012년 6월부터 2년 동안 중소중견금융부장으로 일했다. 검찰 수사결과 그 동안 모뉴엘의 뒤를 봐줘왔다. 지난 6월 은행장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후에도 계속 박 대표를 챙겨준 거였다. 지금껏 박 대표가 서 부장에게 건넨 청탁금은 9천만 원으로 조사됐다.

서 부장 아래에서 팀장으로 근무한 이 모 씨는 2012년 말 모뉴엘 여신 한도를 90억 원에서 300억 원으로 올려준 걸로 드러났다. 당시 대가로 1억 원을 송금 받은 사실이 드러나, 그 역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모뉴엘의 전직 인사팀 직원은 박 대표가 가장 분주했던 건 금융기관 인사철이었다고 했다. "기업은행이나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담당자는 2~3년에 한번 씩 '로테이션' 하잖아요? 그럼 따로 대응했죠. 따로 만나고 술자리 만들고." 거의 모든 담당자에게 접대 시도가 있었다. "중요한 건 안 넘어온 사람도 있다는 거죠. 아무리 '생쇼'를 해도." 접대가 안 먹히면, 박 대표는 서 부장이나 이 본부장 같은 기존 인맥을 활용했다.최우철 취파_640'모뉴엘 커넥션'에 가담한 국책 금융기관과 은행, 일부 국세청 직원은 박 대표 수사상황에 온갖 촉각을 기울일 터다. 그의 진술에서 소환과 조사, 구속, 기소가 이어지고 있다. 이달 중순엔 서울 역삼세무서 소속 52살 오 모 과장이 구속됐다. 모뉴엘 세무조사에 편의를 봐주고 3천만 원을 받은 혐의다. 검찰은 이런 편의가 오 씨 혼자의 결단으로 가능했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무역보험공사 전직 사장도 마찬가지다. 해외로 달아난 정 부장이 사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무렵, 사장 B씨는 여러 차례 박 대표를 만난 것으로 조사됐다. 박 대표의 측근은 취재팀과 만나, 그가 "지난해 추석 무렵엔 현금처럼 사용가능한 기프트카드 50만 원 권, 약 20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B씨는 박 대표와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얼굴을 본 적은 있을 수 있지만, 금품 수수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답했다. 그는 현재 출국 금지된 상태로 확인됐다. 검찰은 그를 소환조사할 예정이다.최우철 취파_640올 하반기, 모뉴엘 금품 수수 혐의로 피의자가 된 공무원, 국책 금융기관 임직원은 5명이다. 무역보험공사 전 사장, 국세청의 또 다른 간부가 수사 선상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모뉴엘이 갚지 않은 대출금은 6천700억 원에 달한다.

동료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국책기관 임직원들은 질타의 시선이 매우 따가울 것이다. 특혜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게, 박홍석 대표 개인의 신출귀몰한 사기 수법으로 기억되길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사기극의 단독 주연이 아니었다. 파국을 잉태하고 방치한 주연급 배우 대부분은 한국무역보험공사와 한국수출입은행 그리고 국세청 임직원이다. 그들의 원래 캐릭터는 '공복(公僕)'이다. 대출 규모를 정확히 판단하고, 불법행위를 제대로 적발하는 게 업이란 얘기다. 캐릭터를 배신한 공복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검찰 수사는 사기극의 전모를 파헤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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