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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행정가, 그러나 청백리는 아니었던 황희

입력 : 2014.12.18 10:34|수정 : 2014.12.18 10:34

이성무 교수 '방촌 황희 평전' 출간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黃喜, 1363~1452)는 흔히 '검은 소 누렁 소'나 '너도 옳고 너도 옳다'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런 뒷이야기들 덕분에 황희를 두고 소탈한 청백리이자 지혜롭고 인자한 현인(賢人)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각인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서 드러나는 황희는 분명히 희대의 명재상이긴 하다.

그가 처음 관직에 오른 때는 고려 말이었지만, 왕조가 바뀌고서도 다시 발탁돼 임금의 최측근으로 오랜 기간 봉직했을 만큼 신뢰받는 신하였다.

황희가 56년간 관직생활 중 무려 18년간 영의정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능함이었다.

태종은 황희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큰 신뢰를 보냈다.

이어 세종을 보좌한 황희는 북방 4군 6진 개척을 뒤에서 지휘했고, 명(明)과 외교관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문제들을 원만히 처리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최고위급 관리인 영의정이었음에도 회의석상에서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영의정이 먼저 의견을 꺼내면 휘하 관리들이 무작정 그에 동조하거나 더는 의견을 내지 않는 일이 많아서였다.

대신 황희는 다른 이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마지막에 종합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이렇다 보니 그가 내는 의견에는 왕인들 딱히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태종과 세종은 으레 "황희 정승 말대로 하라"며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황희는 조선왕조 초기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는 조정자로서 탁월한 판단력과 정무감각을 발휘한 행정가로 평가된다.

반면 '청백리'라는 이미지는 실상과 다소 다르다.

오랫동안 고위직에 있으면서 각종 비위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공직자 감찰기구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재직할 당시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으로 불리는가 하면 인사청탁, 사위의 살인사건 무마 청탁 등 혐의도 받았다.

기본적인 '수신제가'가 안 된 인물의 면모다.

요즘 같으면 '당장 파면하라'라는 여론이 빗발쳤을 터임에도 태종과 세종은 황희를 끝까지 재상으로 중용하며 그에게 의지했다.

이런 일로 내치기에는 그의 국정 수행능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최근 '방촌 황희 평전'(민음사)을 출간한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이렇게 논평한다.

"왕권 국가에서 국왕의 입장은 다르다. 황희의 식견과 경륜이 높고, 일마다 누구보다도 옳은 판결을 하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으로서는 세세한 잘못 따위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 있었다. 왕이 기대고 의뢰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이다. 정치에 있어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은 사례이리라."(453쪽) 책은 역사적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단편적 일화로만 알려진 황희의 실제 면모와 생애, 공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평가하는 데 주력했다.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로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공적은 물론 수뢰 의혹, 친인척 비리 등 개인적 오점에 이르기까지 밝고 어두운 면을 고르게 조명한다.

세종이 황희를 두고 "지혜는 일만 가지 정무를 통괄하기에 넉넉하고, 덕은 모든 관료를 진정시키기에 넉넉하도다"라고 했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저자는 왕의 신뢰가 이 정도였던 만큼 "황희를 청렴결백한 지도자라기보다 능력 있고, 후덕한 경험 많은 명재상의 대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평한다.

540쪽. 2만5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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